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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만에 끝내는 세계사

[5분]만에 끝내는 기본 세계사 5편 - 지중해의 작은 도시 로마

by KS지식 - 문화 YouTube 2022.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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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만에 끝내는 기본 세계사 5편 - 지중해의 작은 도시 로마

 

로마의 상징물은 두 사내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어미 늑대의 조상입니다.

이 모습은 갓난아이였을 때 버려져 늑대의 젖을 먹고 성장한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건국했다는 신화에서 유래합니다.

기원전 510년 로마인들은 반란을 일으켜 증오의 대상이던 에트루리아 왕을 쫓아냈고 아테네인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인들도 더 이상 한 명의 왕에 의한 통치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제가 적합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기에 로마인들은 결국 중간적인 방법을 택했는데 선거를 통해 두 명의 집정관이 이끄는 시 정부를 구성한 것입니다.

집정관의 임기는 일 년에 그쳤고 집정관 한 명이 다른 집정관의 동의 없이 단독으로 사안을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한 사람의 권력이 너무 비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였지만 어차피 핵심적인 권력은 부유하고 명망 있는 세습 귀족 가문 출신의 남자들이 종신회원으로 소속되어 있는 원로원이 쥐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평민들은 공화국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기원전 450년경 열두 개의 동판에 새겨져 광장에 공시된 진보적인 로마법이 이러한 자부심의 원천이었을 겁니다.

이 법은 시민들을 권력의 횡포로부터 보호해 주었고 법적 안전을 보장해주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당연해 보이지만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법제는 훗날 전 세계 법질서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새로운 지배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가 단지 여러 도시들 중 하나라는 사실에 만족할 수 없었고 로마는 이탈리아 최고의 도시가 되어야 했습니다.

기원전 270년경에 로마는 인구 약 300만 명의 이탈리아를 대부분 통치하게 되었고 점령된 도시들은 내정에 자치권을 가지고 고유한 관습과 종교를 유지했습니다.

이들의 의무는 로마에 세금을 내고 전시에 군대를 제공하는 것이었고 로마인들은 이런 느슨한 점령을 통해 반란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피정복민들이 로마의 법률과 효과적인 행정 아래서 이전보다 더 나은 생활을 누리는 경우도 적잖았습니다.

로마인들은 이탈리아의 남쪽 끝까지 정복하고 나서 시칠리아도 공격했고 이렇게 로마는 당시 지중해 서부 지역 최대의 해상 제국이자 무역 강국이었던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와 충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포에니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으로 인해 결국 카르타고는 완전히 멸망했고 시칠리아와 카르타고에 속했던 모든 영토가 로마의 관할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로마는 여전히 만족하지 않았고 그리스뿐 아니라 지중해 동쪽의 다른 나라들도 지배하려 했고 20년이 채 못 되어 그들의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이때부터 로마인들은 지중해를 마레 노스트룸, 즉 우리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끊임없는 정복 전쟁에서 이익을 얻은 것은 누구보다도 로마의 세습 귀족이었는데요, 그들은 전리품을 자기들끼리 나눠 가졌고 전쟁 포로를 자기 집안의 노예로 삼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겼습니다.

귀향한 농민들이 전쟁이 없는 기간에 다시 농지를 경영할 수 있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더 이상 경쟁 능력이 없었습니다.

노예들이 투입된 대단위 농장에서 농산물을 대량으로 값싸게 생산했기 때문에 농민들은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생활을 기대하며 도시로 이주했지만 수공업자나 상인들은 임금을 줄 필요가 없는 노예들을 부릴 수 있었으므로, 일자리는 거의 없었습니다.

예전의 농민들은 이제 직업 없는 프롤레타리아로서 그날그날 생존을 부지하기 위해 분투해야 했고 역사상 최초의 도시 무산자 계급이 되었습니다.

일부 세습 귀족조차 이러한 사회 변동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는데 그라쿠스 형제도 그러한 귀족에 속했습니다.

그들은 개인의 토지 소유와 재산 소유를 제한하고 몰락한 농민과 그 가족들이 다시 생계를 이어 갈 수 있도록 토지 개혁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원로원은 로마 시민들 사이의 균열을 막을 수 없었는데요 이후 70년간 폭력과 내전이 로마 정치의 일상사가 되었습니다.

역사가 살루스티우스는 모든 것이 두 파로 쪼개졌고 공화국은 갈라진 두 세력 사이에서 멸망해 갔다라고 썼습니다.

명장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 어느 내전의 승자로서 급부상했습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10년 임기의 집정관으로 임명했고 곧이어 그의 임기는 종신으로 연장되었습니다.

로마는 형식적으로 여전히 공화국이었으나 카이사르라는 사실상의 전제 군주에 의해 통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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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ksi5ttuWcD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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