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뭐를 먹고 살아야 하나..."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용광로처럼 활활 타오르던 반도체 업계에 불황이 닥치고 있다. 반도체가 한국을 비롯해 미국, 중국, 대만, 일본 등의 패권 장악 무기로 변모하면서 '먹고 사는 경제상품'이던 것이 '죽고 사는 안보상품'이 돼버렸다.
'삼성 공화국'이라고 불리는 경기 평택고덕 반도체 공장 건설현장은 잘나가던 시절, 매주 평균 1000명에 가까운 신규 근로자를 뽑았지만 이젠 필요할 때만 충원한다. 더욱이 기존 인력을 쳐내기에도 바쁘다. 적게는 2만 명, 많게는 3만 명의 현장 인력이 사라졌다. '고덕 숙노(고덕 숙소 노가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네가 북적북적댔지만 지금은 방 빼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충북 청주 SK하이닉스 현장도 썰렁하다. 한때 협력업체 노동자가 1만 2000여 명에 달했지만 지금은 1000여 명도 안 되는 인력이 마무리 작업을 한다. 여기저기서 '끝물' 현상이 보인다. 아침 조회(TBM)시 빽빽하게 모여 체조하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시장통 같던 식당은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도 차례가 온다.
내가 일하는 반도체 현장도 직격탄을 맞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공(단순보조작업자) 월급이 500만~800만 원에 달했지만 일거리가 크게 줄며 임금이 반 토막 났다. 연장·철야 근무는 옛말이고, 매일 '맨대가리'(기본 공수)에 그친다. 이마저도 일자리가 없어진 노동자들은 짐을 싸서 떠나고 있다.
칼바람 부는 반도체... 노동자는 파리 목숨
누군가는 잘렸고 누군가는 돈을 좇아 떠났다. 이 모든 책임을 정부에게 물을 수야 없겠지만 노동자는 괴롭다. 미국의 반도체 패권선언에 우리나라는 샌드위치 신세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 반도체법(CHIPS Act)에서 규정한 투자 보조금을 받으면 이후 10년간 중국에서 반도체 생산능력을 5% 이상 확장하지 못한다. 엎친 데 덮친 격
에스케이(SK)하이닉스가 글로벌 경기침체에 따른 메모리반도체 가격 급락 여파로 지난해 4분기에 1조7012억원 적자를 냈다. 이 업체는 “지난해 4분기 시작한 감산을 올해도 이어가고, 투자 역시 지난해 대비 절반 이상을 줄이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메모리반도체 가격 하락이 이어지는 흐름이어서 이 업체의 실적 하락세도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에스케이하이닉스는 지난해 4분기 영업이익이 -1조7012억원으로, 전년 동기(영업이익 4조2천195억원)에 견줘 적자 전환했다고 1일 공시했다. 이 업체의 분기 기준 영업적자는 2012년 3분기(-240억원) 이후 10년 만이다. 에프앤(FN)가이드가 집계한 시장전망치 1조2천억원 영업적자보다 5천억원(42%) 많았다. 연간 매출은 44조6481억원, 영업이익은 7조66억원으로, 2021년에 비해 매출은 4% 늘었으나 영업이익은 44% 감소했다.4분기 대규모 영업적자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본격화한 메모리반도체 가격 급락 탓이다. 특히 삼성전자는 메모리·시스템반도체는 물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사업까지 영위하는 종합반도체기업(IDM)인 반면, 에스케이하이닉스는 사실상 메모리반도체 기업이어서 충격이 더 컸다. 에스케이하이닉스는 “팬데믹과 지정학적 위기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 이슈, 인플레이션 대응을 위한 금리 인상 등으로 거시경제 환경이 악화하면서 지난해 하반기부터 반도체 수요가 큰 폭으로 감소했다”고 설명했다.
향후 전망은 더욱 불투명하다. 시장조사업체 디(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디램 범용제품(DDR4 8Gb)의 1월 평균 고정거래가는 1.81달러로 전달보다 18.10% 떨어지는 등 하락세가 꼬리를 물고 있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올 1·2분기 에스케이하이닉스 영업적자에 대한 증권사 컨센서스는 각각 1조9189억원, 1조8567억원으로 지난해 4분기보다도 많다. 에스케이하이닉스는 “상반기 역시 다운턴이 심화하는 상황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하반기로 갈수록 시장 상황이 개선될 것으로 전망한다”고 밝혔다.수익성 악화에 따른 감산도 계속 진행할 계획이다. 지난해 10월 3분기 실적 발표 때 밝힌 대로 올해 투자 규모는 2022년 19조원의 절반 이하 수준으로 줄일 계획이다. 다만, 수요가 늘고 있는 최신 고사양 디램 반도체(DDR5·LPDDR5·HBM3) 등과 미래성장 분야 투자는 지속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에스케이하이닉스의 메모리반도체 비트(bit) 생산증가율은 에스케이그룹에 편입된 2012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보일 전망이다. 비트 생산증가율은 저장용량을 기준으로 생산이 얼마나 늘었는지를 따지는 것으로, 생산량으로 따질 때 생길 수 있는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에스케이하이닉스의 이런 행보는 전날 삼성전자가 반도체사업 영업이익이 2천억원대에 머무는 수준의 초라한 4분기 성적표를 내놓으며 밝힌 것과 대비된다. 삼성전자는 “미래를 철저히 준비할 좋은 기회”라며 “올해 시설투자(캐펙스·CAPEX)는 전년과 유사한 수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투자를 지속하고, ‘인위적 감산’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두 회사의 차이를 두고, 에스케이하이닉스는 재무건전성 확보에 우선순위를 둔 것이고, 삼성전자는 메모리반도체 경쟁력 강화와 함께 파운드리사업에서 대만 티에스엠시(TSMC)와의 격차가 더 벌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란 풀이가 나온다.이날 에스케이하이닉스 주가는 전날(8만8500원)보다 3.28% 오른 9만1400원에 장을 마쳤다.으로 이미 제조된 반도체 물량이 넘쳐나 몇조 원대의 적자도 기록 중이다.
이는 현장 일꾼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돈을 향해 몰려들었던 불나방들은 살길이 막막하다. 청주에서 부산으로, 평택에서 이천으로, 다시 청주에서 아산 탕정으로, 또다시 평택에서 용인, 파주로 떠나야만 한다. 길 잃은 유목민 신세다. '조선족'(조선소 출신)들은 연어가 모천으로 회귀하듯 거제 등지로 돌아간다.
나 또한 언제 보따리를 싸야 할지 모른다.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하고, 언제 칼바람이 불어 닥칠지 노심초사다. 간당간당한 파리 목숨이다. 이제야 일이 몸에 익어 할 만해졌는데, 차디찬 한겨울의 한풍도 어렵게 견뎌냈는데 봄바람이 불자 된서리를 맞고 있다.
일할 사람은 넘쳐나는데 일자리가 사라지니 졸지에 백수가 창궐한다. 일이 넘쳐날 땐 일이 힘겨워 매일매일 쉬고 싶고, 막상 일이 떨어지면 일하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일'이란 언제나 이율배반의 평행선을 달린다. 매일 매일 일이 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은 없다.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으니 일을 하는 것이다. 사명감이니 보람이니 하는 개똥철학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자와 소시민에게 있어서 노동은 도망칠 수 없는 절벽 같은 것이다.
문제는 일이 없어졌을 때의 상실감이 더 크다는 것이다. 오늘 갑자기 내일이 없어지는 충격적인 '현타(현실 자각 타임)'에 직면하면 공포스럽다. 출근이란 늘 지겨운 윤회지만 막상 출근할 필요가 없어지고 나면 마음 한편에 구멍이 나는 것이다. 여행이 즐거운 이유도 땀 흘린 대가로 아주 가끔 주어지는 자유이기 때문 아닌가. 일 년 내내 일하지 말고 여행만 다니라고 한다면 그건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이다.
'살아보니 친구로 남은 건 소주, 담배, 커피뿐'이라는 말이 딱 내 현실이다. 모두가 쓴맛만 남았다. 나는 막일을 하며 막일에 대한 선입관을 완전히 뜯어고쳤다. 부끄러워야 할 직업이 아니라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의 그릇된 인식이다. '막일'을 그저 천한 '남일'로 생각하는 사람이 부끄러운 것이다. 그래서 일이 소중하다. 일이 끊이지 않았으면 좋겠고, 여력이 있는 한 노동판에서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풍랑이 일 때는 피할 방법이 없다
막일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유년시절의 기억이 한몫했다. 사과 과수원을 했던 우리 집은 부농이 아니라, 근근이 체면은 깎지 않을 정도의 빈농이었다. 아버지는 사과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자 과수원 사이사이에 여러 곡물, 채소들을 심었다. 어느 해엔 땅콩을 심었고, 호박, 감자, 고추, 오이 등도 심었다. 사과가 본업인지 부업인지 모를 정도로 땅 한 뼘도 빈틈이 없었다.
문제는 노동력이었다. 사람을 사서 농사를 지어보고 인건비 감당이 안 되자 자식들 힘을 빌렸다. 사과 적과, 농약치기, 거름주기, 사과 따기, 호박 심기, 고추심기, 따기 등 겨울을 뺀 1년 농사를 함께 했다. 자식농사보다는 돈벌이농사가 급했다.
그러다 보니 휴일이 사라졌다. 평일엔 학교를 다니고 주말엔 밭으로 나가야했다. 시내에 사는 친구들이 축구하자고 하는 날에도 난 농약줄을 잡고 있었다. 언젠가는 아버지 허락을 받지 않고 하이킹을 다녀왔다가 호되게 혼난 적도 있다. 그날 이후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내게 휴일은 거의 없었다. '시지프스 노동' 같았다.(시지프스는 신을 기망한 죄로 제우스신의 노여움을 받아 산꼭대기에 커다란 바위를 올려놓고, 굴러 내려오면 또 올려놓는 무한반복 노동의 형벌을 받은 신화 속 인간이다.- 기자 말)
이제 유년의 노동은 기억에서 추억으로 치환된다. 힘에 겨웠던 아버지의 노동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아버지의 눈물과 화해하기 시작했다. 자식에게까지 어쩔 수 없이 시켜야 했던 막일에 대한 고통을 알게 된 것이다. 난 가끔 그때를 떠올리면 없던 힘도 생긴다. 조그맣게 붙어있는 근력의 DNA가 꿈틀댄다.
당시 아버지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이고, 당시 아들이었던 내게도 그 나이대의 아들이 있다. 나의 노동은, 나의 아들들에게 노동을 답습시키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나는 두 아들을 생각하면 시지프스의 노동을 감내할 자신이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뼈가 닳아도 나의 DNA는 아버지의 과거를 겨냥하고 있지 않다.
지금도 20대 중후반의 두 아들과 조우할 때면 뽀뽀로 인사한다. 서로가 징그럽다고 느끼지 않으니 부끄럽지도 않다. 모든 걸 다해주지도 못했는데 잘 커 줬고, 그들은 내 막일을 이해하고 응원해 준다. 더욱 고마운 것은 아빠의 막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휴, 잘 살았다."
풍랑이 일 때는 피할 방법이 없다. 잔잔한 물결이 너울로 변하는 순간 삼각파도는 절벽의 등허리를 때리며 산산이 부서진다. 그 파고는 밀려오는 물결과 밀려나가려는 물결이 부딪쳐 집채만 한 배를 집어삼킬 수도 있다.
지금 겪는 고부채, 고금리, 고물가의 3각파도가 그것이다. 다중위기(polycrisis)다. '이웃이 실업자가 되면 경기불황이고,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으면 경제공황이며, 정부가 정신 차리면 그게 경기회복'이란 말이 있다. 지금 노동자가 할 일은 가시적으로 보이는 3각 패턴을 디디고 버텨야 할 때다.
지금 내 일상에 일고 있는 풍랑도 언젠가는 잠잠해질 것이라고 본다. 제2의 삶에 있어서 작은 풍랑은 불가피하게 오는 것이며, 그것을 피한다면 좌초될 것이 자명하다. 노동판에서 잘리지 않을 때까지, 손 아귀힘이 남아있을 때까지 나는 이 길을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걸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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