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세계사] 9편. 청나라 망조가 들다! - 태평천국운동 (12분 ver)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면서 자존심은 물론 경제적으로 정말 거지꼴이 되는데 폐허가 된 마을, 수많은 난민들, 아편 중독 상태인 관리들까지 말입니다.
이런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한 인물이 태어나는데 농민 대봉기를 주도할 홍슈취안입니다.
홍슈취안은 1814년 중국이 아편에 찌들어가던 시절의 광둥성에서 태어났고 출세할 길은 오로지 과거에 급제하는 길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계속 응시하지만 계속 낙방하다가 광저우 시내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 서양인 한명이 다가와 책한 권을 건넵니다.
그 책은 성경을 한자로 편집해서 만든 권세양언이었습니다.
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구석에 처박아 놓다가 과거에 또 낙방한 후 고향집에 돌아온 홍슈취안은 희한한 꿈을 꿉니다.
꿈속에서 웬 흰 수염의 남자가 나오더니 내가 네 아버지 하느님이다라고 하는겁니다.
그리고 그에게 아들아 지상에 내려가 요괴들을 다 물리쳐라 라는 지령을 내립니다.
홍슈취안의 무리는 공자상을 부수고 사찰을 파괴하는 과격한 행동을 하면서 조직의 인원은 1만 명 이상으로 불어납니다.
1851년 1월 11일 홍슈취안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또 다른 요괴로 명명하고 청나라 요괴 타도를 외치며 농민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바로 태평천국의 난입니다.
세를 엄청나게 불린 태평천국군은 1853년 3월 중국의 경제 수도인 난징을 점령하고 난징을 그들의 새로운 수도로 삼거 새로운 나라를 세웁니다.
난징을 수도로 새 나라를 건설한 홍슈취안은 뜻밖에도 민심을 서서히 잃어갔습니다.
너무나 엄격한 금욕주의, 개인 재산 불인정, 철저한 단체 생활을 힘들어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서구 열강들도 처음에는 태평천국을 지지하다가 등을 돌리게 되고 1864년 7월 19일 수도인 난징이 청나라 정부군에 함락되고 근 20년 동안 중국을 뒤흔들었던 태평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영국 입장에선 또 무역적자의 악몽에 시달리게 되면서 영국이 생각한 해결방법은 전쟁입니다.
전쟁의 명분을 찾던 중, 1856년 10월 중국 광저우 앞바다에 애로호라는 배가 등장합니다.
배 주인은 영국 사람이었지만 승무원들은 다 중국인이었고 마침 그때 해적을 단속하고 있던 청나라 단속반이 애로호의 중국인 승무원들을 조사하려합니다.
그때 선장은 이 배는 영국 배니까 중국인 단속반은 빨리 내리라고 하면서 시비가 붙는데 화가 난 청나라 단속반이 배에 걸려 있던 영국 국기를 뽑아서 발로 밟고 바다에 던집니다.
영국은 이를 구실 삼아 다시 청나라와 전쟁을 시작하는데 이것이 제2차 아편전쟁입니다.
2차 아편전쟁이 1차와 다른점이 있었다면 이번 전쟁에는 프랑스가 영국 편으로 참전했다는 점입니다.
애로호 사건이 있기 8개월 전에 프랑스 선교사가 중국 내륙에서 몰래 선교활동을 하다 처형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억울하게 죽은 그 신부님의 복수라면서 이 전쟁에 뛰어드는데 이건 표면상의 이유였고
진짜 이유는 영국처럼 프랑스도 이제 종이호랑이가 되어버린 청나라에서 콩고물 좀 얻어먹어 볼까 하고 전쟁에 뛰어든 것입니다.
1857년 12월 28일 영·프 연합군은 또다시 광저우에 공격을 가해서 무려 하루만에 점령합니다.
당시 청나라는 태평청국군을 진압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중국 정부는 그때의 아픔을 잊지 말자는 취지로 원명원을 복원하지 않고 폐허 그대로 둡니다.
이후 청나라 황제는 베이징으로 반 강제로 끌려왔고 다시 영국, 프랑스와 더욱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하는데 이것이 바로 1860년 베이징 조약입니다.
조약의 내용은 영국은 홍콩 위에 있는 구룡 반도를 가져가고 홍콩은 이때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합친 지금의 모습을 거의 완성합니다.
그리고 청나라는 프랑스로부터 빼앗은 중국내 가톨릭 재산들을 다 토해냅니다.
그리고 영·프 연합국의 분쟁을 러시아가 중간에서 중재를 하면서 싸움을 말렸던 러시아도 자기 몫을 챙기는데 극동 연해주를 차지하게 됩니다.
러시아 지도에서 블라디보스토크가 있는 지역이 바로 연해주인데 베이징조약 체결 이후 러시아 땅이 된 것입니다.
양무운동 자체를 청나라 황실이 주도했는데 어떻게 얻은 밥그릇을 포기하고 스스로 물러나기 쉽지 않아 대충 개혁하는 척만하고 서양의 무기나 사오라는 식으로 진행한겁니다.
반면 메이지 유신은 당시 에도막부 정권 자체를 뒤집어엎었던 것입니다.
이 양무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걸 보여준 대표적인 예가 바로 1894년 청일전쟁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개혁을 한 신일본군과 나름 양무운동으로 개혁하고 신무기로 무장을 한 청나라군이 우리나라 땅에서 벌인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의 참패로 끝납니다.
위기의 중국을 구해줄 혁명가가 등장하는데 1866년 중국 남부 광둥성에서 쑨원이란 인물이 태어납니다.
지금도 대만과 중국 본토에서 국부로 칭송을 받는 바로 그 쑨원입니다.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의 국부기념관에선 아직도 대만의 아버지로 쑨원을 기리고 있고
중국 본토의 거의 모든 주요 도시의 중심거리 이름은 중산로인데 쑨원의 호인 중산을 따서 이름 지은 것입니다.
중국 난징에 가면 쑨원의 무덤인 중산릉이 있는데 한국도 마찬가지로 무덤에 릉을 붙이는건 중국에서 황제와 왕에게만 가능합니다.
쑨원의 무덤에도 릉을 붙였다는 건 중국인들에게 쑨원은 이미 왕과 같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쑨원은 어릴 때 가난했었는데 하와이에서 서구식 교육도 받고 기독교도 접하면서 세상의 이치, 중국의 객관적인 상황 등에 눈을 뜹니다.
이후 홍콩으로 가서 서양식 의대에 진학하고 1892년에 의사 면허를 땁니다. 하지만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나라를 거의 뭉개버리자 쑨원은 결심합니다.
만주족의 청나라를 뒤집는 혁명을 일으키자라고요.
그렇게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직후 쑨원은 만주족을 몰아내고 한족만의 공화국을 세우자란 취지에서 흥중회라는 혁명 단체를 결성합니다.
1895년 쑨원은 자신의 고향인 광저우에서 청나라에 대항하는 첫 무장봉기를 일으키지만 내부자 비밀 누설 등으로 처절하게 실패합니다.
그 뒤로 일본, 미국, 영국 등을 떠돌며 객지 생활을 합니다.
영국 런던에 머물 때는 대영 도서관에 거의 매일 살다시피 하면서 여러 분야의 책을 탐독하고 쑨원의 중심 사상인 삼민주의(민족, 민권, 민생)을 서서히 만들어 나갑니다.
민족은 만주족을 몰아내고 한족의 나라를 세우자, 민권은 더 이상 황제나 왕 따위는 필요 없으니 민주주의를 만들자, 민생은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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