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투리시간에 공부하는 한국사] - 31. 독도, 간도의 역사 바로알기
독도의 경우 지금도 일본과 영토분쟁에 등장하는 지역으로 우리가 반드시 역사적 사실로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번 영상을 통해서 독도에 대해서 세계의 외국인 누가 물어봐도 당당하게 역사적 사실로 우리땅임을 증명할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산국은 울릉도를 중심으로 독도를 포함하는 나라였습니다.
[삼국사기]에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복해 신라에 합병시킨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 세종 때 자료를 중심으로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 후기 숙종 때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이란 사실을 인정하기도 했는데요, 1693년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일본 어부들에게 안용복이 항의합니다.
그러자 일본 어부들은 안용복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끌고가는데요, 안용복은 일본에 끌려가서도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결국 이 사실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외교 문서를 막부로부터 받아내는데, 일본 어선들은 울릉도와 독도 부근에 다시 나타납니다.
그래서 1696년 안용복은 관리복장을 하고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해결을 하려고 [조선팔도지도]를 챙겨가는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막부 권력자를 만나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이니 일본인들이 건너오는 것을 막아달라고 주장합니다.
일본 관리는 안용복이 가져온 [조선팔도지도]를 문서로 옮겨 적으면서 독도와 울릉도를 조선의 강원도에 속한 섬으로 기록합니다.
일본 막부는 일본 어민들에게 울릉도에 가지 못하도록 도해 금지령을 내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안용복은 귀국 후 나라의 허락없이 관리 행세를 하며 외교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귀양까지 가게 됩니다.
1876년 일본 정부는 모든 현의 지도를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시마네현은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의 영토에 포함할지 여부를 결정하기위해,
[기죽도약도]라는 지도를 일본 내무성에 제출하는데, 관련 내용 조사 후 일본 내무성은 두 섬을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이므로 내무성은 다시 이 문제를 당시 일본의 최고 행정 기관인 태정관에게 올립니다.
자료를 검토한 태정관은 두 섬은 일본과 관계없는 땅이니 이를 관리들에게 알리라는 [태정관 지령문]을 시마네현에 내려보닙니다.
이 문서는 일본이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인정한 중요한 증거 중 하나로 꼽힙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일본 어민들의 불법 침입이 계속됩니다.
이에 대한 제국은 1900년 [대한제국칙령 제41호]를 통해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시켜 독도를 관할케 하고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분명히 합니다.
후에 러일 전쟁이 일어난 틈을 타 일본은 불법으로 독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시킵니다.
1904년 일본은 러시아와의 해전을 준비하면서 독도가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독도를 주인없는 섬으로 선포하고 그곳에 망루를 설치합니다.
1905년 일본은 독도의 이름을 다케시마로 바꾸고 시마네현에 포함시킨다는 내용의 시마네현 고시를 내립니다.
당시 독도는 바다사자의 일종인 강치의 천국이었는데요, 일본인 어부가 독도의 강치잡이를 독점하려고 계획하고 강치잡이 허가 요청서를 대한 제국 정부에 제출해달라고 의뢰합니다.
이에 일본 정부는 1877년의 태정관 지령에 따라 독도가 한국 영토인 것을 알고 있었을테지만 그 어부의 강치잡이 허가서 제출을 빌미로
독도를 무주지로 간주하고 자국의 영토로 강제 편입하는데 이는 국제법상 명백한 불법 영토 침탈행위입니다.
간도에 대해서 알아보면, 간도는 두만강과 쑹화강 사이에 있는 땅을 가리킵니다.
청은 만주족이 세운 국가인데 만주족의 발상지가 바로 간도여서 청 정부는 간도를 신성하게 여기고 간도 지역의 출입을 금합니다.
조선 정부 역시 청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간도로 넘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양국에서 막으려해도 양국의 백성들이 경계를 넘는일이 많아지고 간도를 둘러싼 분쟁이 계속 일어나자 청은 조선에 백두산 일대의 경계를 명확히 하자고 제안합니다.
이에 조선과 청은 각각 대표를 파견해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합의한 내용을 담은 비석을 세우는데 이것이 바로 백두산정계비입니다.
이 비석에 [서위압록 동위토문]이라고 새겨져 있는데요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조선과 청의 백성들이 경계를 넘는 일은 계속 되고 특히 19세기 후반에 조선인들의 간도 이주가 늘어납니다.
청은 간도에서 조선인을 내보내려 하면서 조선과 청의 대표가 또 만나 백두산정계비의 해석을 두고 양국이 팽팽히 맞섭니다.
하지만 토문강의 해석을 도구 양측 모두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합니다.
이후 대한 제국 정부는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임명하여 수십만 명의 한인이 거주하는 간도 지역을 직접 관리하기 시작합니다.
대한 제국은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고 일본이 청나라와 간도 협약을 맺게 됩니다.
간도협약에서 일본은 만주의 철도 부설권과 탄광 개발권을 얻는 조건으로 간도 지역을 청의 영토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후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간도를 비롯한 만주 지역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간도 지역은 항일 무장 투쟁 등 민족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겪으며 일제 강점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관련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82XudkrJX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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