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짜투리시간에 공부하는 한국사] - 27. 대한제국

by KS지식 - 문화 YouTube 2022. 8. 31.
반응형
SMALL

[짜투리시간에 공부하는 한국사] - 27. 대한제국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급진 개화파 세력중 서재필은 갑신정변 실패 후 1885년 미국으로 망명을 하였는데 정부는 10년 후 귀국제의를 합니다.
1895년에 고국으로 돌아온 서재필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1895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도 설립합니다.
그리고 독립협회는 청으로부터 자주권을 되찾은 기념으로 독립문을 세우는데요 독립문 건립 기금을 내면 독립협회의 회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저항하여 일어난 의병에게 해산을 권유하고 이제 대부분의 의병이 자진 해산하고 활동을 중단합니다.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상소가 빗발치고 중심에는 독립협회가 있었는데요, 고종은 피신 후 1년을 버티다가 친위대의 경비 능력이 갖춰진 후 경운궁으로 환궁합니다.
환궁 이후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해 칭제건원이 제기되고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바꾸거 대한 제국을 선포합니다.


고종은 1897년 환구단에서 제사를 지낸 후 황제로 즉위하는데요, 이를 통해 우리나라는 황제가 다스리는 자주독립국임을 알리고자 하지만 열강의 이권요구는 계속됩니다.
러시아는 군사 교관과 재정고문을 파견하고 한러은행을 설립하며 절영도 조차 등 여러 이권을 요구합니다.
이에 맞서 독립 협회는 1898년 러시아의 요구를 규탄하는 만민 공동회를 열고 러시아의 침략 정책에 항의합니다.
결국 러시아는 재정 고문을 철수 시키고 한러 은행을 폐쇄하고 절영도 조차 요구까지 철회합니다.
독립 협회는 1898년 10월 종로에서 정부 대신들까지 참석한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는데요, 이때 천시받던 백정 출신 박성춘이 연설을 합니다.
이 자리에서 박성춘은 정부 관리들과 양반 출신 사람들 앞에서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방도는 관리와 백성이 마음을 합해야 한다고 연설합니다.
이 관민 공동회에서 국정 개혁안인 헌의 6조가 제기되고 황제가 이를 수락합니다.
헌의 6조 내용은 대략 독립협회는 입헌 군주제를 지향하는데요 이는 왕도 법의 통치를 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경제 면에서는 탁지부로 재정을 일원화할 것을 건의하고 사회 면에서는 피고의 인권을 존중하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중추원은 입법권, 정부 안건 심사권, 정부 정책 자문권을 행사하도록 개편되고 중추원 제도의 개편은 의회 설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보수관료들은 독립협회의 위상과 입지가 커질 것을 우려하여 고종에게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세우려 한다고 모함합니다.
정부는 시위가 거세지자 보부상으로 구성된 어용 단체인 황국 협회를 통해 만민 공동회를 공격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독립협회를 해산시킵니다.
독립협회를 해산한 고종은 본격적으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는데요,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고 자주독립과 전제 군주정을 선포합니다.
대한 제국은 갑오 을미개혁의 급진성을 비판하고 점진적으로 광무개혁을 이어가고 광무개혁의 정신은 구본 신참으로 온건 개화파가 추구한 동도서기와 유사합니다.
광무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은 러시아와 일본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일본이 러시아 군함을 기습공격하면서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는데요, 일본은 러일전쟁중에 한일 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합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마음대로 대한 제국의 군사기지를 마음대로 사용하고 일본인의 이주, 재정과 외교 장악, 철도 부설, 황무지 개간권 등을 요구합니다.
일본은 대한 제국에 제1차 한일 협약 체결을 강요하는데요, 한국에 고문을 파견하여 내정간섭을 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일본인 메가타 다네타로와 미국인 스티븐스는 대한 제국의 재정과 외교를 감독하고 통제합니다.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체결, 영일 동맹 등을 통해 물밑작업을 완료하고 미국의 중재로 러일전쟁이 종료되면서 한국에 대한 독점 지배를 인정받습니다.
1905년 이토히로부미는 군대를 동원하여 궁궐을 포위하고 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하는데, 이것이 바로 을사늑약입니다.
일본은 이완용, 이지용, 권중현, 박제순, 이근택을 앞세워 조약 체결을 강행하는데 황제의 비준 없이 체결되었으므로 원칙상, 국제법상으로 무효입니다.
한편 유럽에서 독일을 주축으로 한 삼국과 영국 중심의 삼국 사이에서 전운이 맴도는데요, 이를 완하하기 위해 1907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됩니다.
이에 러시아가 초대장을 보내고 고종은 만국 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지만 회의에 참석은 못합니다.


하지만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각국 대표에게 탄원서를 보내고 일본의 국제법 위반 행위를 폭로합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이준은 지병과 화병으로 그곳에서 숨을 거둡니다.
헤이그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퇴위시키고 아들 순종을 허수아비 황제로 앉힙니다.
그리고 대한 제국의 군대를 해산하고 이어 우리의 사법권과 경찰권까지 빼앗는 기유각서를 단행합니다.
일본 통감은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병합 조약안을 제시하고 수락할 것을 독촉하면서 1910년 8월 22일 결국 한일 병합 조약이 강제로 체결됩니다.
이렇게 대한 제국은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는데요,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조선 총독을 최고 통치자로 둡니다.

 

27강 독립협회 대한제국.hwp
0.07MB



관련영상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OV1fFjiLy5M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