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투리시간에 공부하는 한국사] - 16. 붕당 정치의 변질과 탕평정치
두 차례의 예송으로 대립이 치열해지긴 했지만 공존의 원칙은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제2차 예송의 결과 권력을 잡은 남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고 서인은 권력을 되찾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숙종이 즉위합니다.
숙종은 조선 전기 태종과 세조에 견줄만큼 카리스마가 있는 왕입니다.
숙종이 강력한 왕권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정통성입니다.
조선에서 적장자로 왕이 된 인물은 단 7명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효종, 숙종, 순종입니다.
숙종은 정통성을 무기로 조정을 장악하고 환국 정치를 통해 왕권을 강화합니다.
숙종은 여러 차례 환국을 일으켜 남인과 서인에게 번갈아 가며 세력을 몰아주며 붕당의 역학 관계를 이용해 신하들을 통제한 진정한 카리스마 왕입니다.
권력을 장악한 남인의 힘을 누그러뜨릴 기회가 찾아오는데 남인의 당 대표인 허적이 집안 잔치에 왕실의 천막을 왕의 허락 전에 가져다 쓰는 일이 발생합니다.
숙종은 남인의 주요 신하들을 쫓아내고 서인들을 복귀시킵니다.
이 와중에 허적의 서자 허견이 역모를 꾀한다는 제보를 받고 허적, 허견, 윤휴 등 남인의 실세들이 모두 처형을 당하는데 이것이 경신환국입니다.
장희빈과 장희재 남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남인들과 함께 계략을 세워 서인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합니다.
서인도 맞고변을 하자 처음에는 남인편을 들어주는 척하다가 결국 서인 편을 들고 남인들을 축출하는데 이 사건이 갑술환국입니다.
이후 숙종은 인현왕후를 왕비로 복위시키고 장희빈을 빈으로 강등합니다.
인현 왕후가 복위 7년뒤에 병으로 죽자 인현 왕후를 저주해 죽였다는 죄를 물어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립니다.
장희빈과 함께 남인은 완전히 몰락합니다.
숙종은 환국 정치를 통해 강력한 왕권을 계속 유지하며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활발하게 유통시키는 등 추진이 어려웠던 정책을 밀어붙입니다.
공존의 정치는 자취를 감추고 일당 전제화 현상이 나타납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영조를 지지한 노론이 정권의 실세로 부상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계속되고 조선의 정치는 피폐해집니다.
이에 영조는 탕평 정치를 실시하며 정치적 안정을 위해 각 당파에서 인재를 골고루 등용합니다.
각 붕당의 강경론자를 배제하고 온건한 입장의 탕평론자들을 기용합니다.
영조는 자신의 탕평의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웁니다.
영조는 어머니인 숙빈의 신분이 미천하여 왕자 시절부터 무시를 많이 당하고 왕위 계승과정에서 벌어진 노론과 소론의 정쟁에 휩쓸리기도 합니다.
경종이 후사 없이 일찍 죽자 경종 독살 혐의도 받게 됩니다.
노론의 강력한 지지로 왕위에 올랐기에 노론의 눈치도 봐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러 콤플렉스에 시달렸지만 영조는 허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공부와 강론을 게을리하지 않고 경연에 누구보다 열심히 임합니다.
이런 영조에게 엄청난 비극이 일어나는데 바로 사도 세자와 관련된 일입니다.
즉위 4년만에 첫 아들을 잃고 7년간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는데 영조가 42세가 되는 해에 사도 세자가 태어납니다.
영조는 사도 세자를 데리고 다니면서 국정을 익히도록 하고 세자를 교육하기 위한 책을 직접 지어주기도 하는 등 사도 세자에 대한 사랑과 기대는 엄청났습니다.
어린 시절 영특한 모습을 보이던 세자는 점점 글공부를 멀리하고 무예에 관심을 가지며 무예서를 편찬하기도 합니다.
영조는 자신의 기대와 다른 모습을 보이자 혹독하게 질책합니다.
사도 세자를 테스트하기 위해 영조는 또 한 번 양위소동을 벌이며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제안합니다.
경험이 부족한 세자가 국정 운영에 미숙한 점을 보이면 영조는 심하게 세자를 꾸중하였고 세자는 점점 엇나가기 시작하고 일탈과 광증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사도 세자의 모습을 몇몇 인사가 영조에게 고변하고 친모인 영빈 이씨도 사도 세자를 벌하라 합니다.
영조는 사도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물 한모금도 주지 않게하여 사도 세자는 뒤주에 갇힌 지 8일만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영조가 죽고 뒤를 이어 사도 세자의 아들이자 영조의 손자인 정조가 왕위에 오릅니다.
정조는 영조의 뒤를 이어 탕평 정치를 계승합니다.
정조는 붕당을 인정하되 붕당 간의 시시비비를 명백히 가린다는 입장입니다.
쟁점이 생기면 이치에 맞는 주장으로 판단되는 당의 손을 들어주었는데 이는 왕이 신화들의 궤변에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총명했고 공부를 정말 많이 한 왕이어서 왕이 되었을 때는 유학적 소양과 학식이 신하들을 압도합니다.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개혁을 추진합니다.
왕실 도서관이었던 규장각을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발전시킵니다.
세종의 집현전, 성종의 홍문관, 정조의 규장각으로 맥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초계문신제를 실시합니다.
이는 의정부에서 젊은 인재를 선발하고 국왕에게 보고하여 본래 직무를 면제한 뒤에 규장각에 소속시켜 학문을 연마하게 한 제도입니다.
한창 개혁을 하던 정조는 47세의 나이로 급장스럽게 사망하고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카리스마를 뿜어냈던 영, 정조의 시대가 막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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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에 더 자세한 내용이 있고 좋아요는 더 좋습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K6gj9F_ok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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