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투리시간에 공부하는 한국사] - 14. 임진왜란
조선 전기의 외교는 사대교린이라는 틀에서 움직입니다.
사대는 수직적으로 큰 나라를 섬긴다는 뜻이고 교린은 수평적으로 이웃 나라와 사귄다는 뜻입니다.
조선의 사대에 해당하는 나라는 중국의 명이고 교린에 해당하는 나라는 여진과 일본 등입니다.
당시 동아시아는 명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상황이었고 조선은 조공, 책봉 체제를 통해 명에 사대 외교를 취하고 있던 상황입니다.
사대외교는 좋지 않게 보통 생각되는데 당시 조선의 사대 외교는 자주적인 실리 외교였습니다.
명에 대한 조선의 조공은 실질적으로 경제적, 문화적 교류에 가깝습니다.
교린에 해당하는 나라는 주로 여진과 일본으로 회유책과 강경책을 사용합니다.
여진은 조선 국경 지역에 출몰하여 약탈을 일삼습니다.
조선은 군대를 동원에 토벌하는데 세종은 최윤덕과 김종서를 파견하여 4군 6진을 설치합니다.
세종은 남부 지역의 백성들을 북방의 국경지역으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실시해 개척한 지역을 확실한 우리 영토로 만듭니다.
이러한 지역에는 지방관이 출신지역에 파견되어 근무하는 토관 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북방 국경 지역에 한해서만큼은 상피제를 적용하지 않고 북방 국경 지역을 안정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민 정책과 토관 제도는 4군 6진 개척에 따른 후속 정책입니다.
여진에 대한 회유책으로 국경지역 경원과 경성에 무역소를 설치합니다.
일본에게도 강경책과 회유책을 동시에 사용하는데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은 극에 달하고 왜구를 격퇴하며 권력을 잡고 민심을 얻은 인물이 이성계였고 조선이 건국됩니다.
왜구 침입이 계속되자 세종은 이종무를 보내 왜구의 은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합니다.
회유책은 역시 무역 허용입니다.
대마도 정벌이후 조선이 일본과의 교역을 중단하자 일본은 생필품이 부족해지고 대마도주의 간곡한 요청으로 계해약조를 맺고 조선은 염포, 부산포, 제포 3포를 개항해 제한적인 무역을 허락합니다.
16세기가 되면서 3포에서 거주하던 일본인의 무역량을 통제하자 부족하다면 난리를 칩니다.
이에 중종은 무역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고 규정을 더 철저히 지키도록 합니다.
이에 반발하여 왜인들이 일으킨 반란이 바로 1510년의 3포 왜란이고 이후 크고 작은 변란이 계속됩니다.
조선 정부는 변방의 비상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비변사를 설치합니다.
비변사는 임시기구로 고위 관료들이 국방상 중요한 일을 신속히 결정하기 위한 회의 기구입니다.
3포 왜란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통교를 중단하다가 이후 일본의 요청으로 제한적 무역을 허가하지만 왜인들의 소규모 침략은 계속됩니다.
그러다 그 규모가 점점 커져 명종 때 을묘왜변이 터집니다.
을묘왜변을 계기로 비변사는 상설화되고 문무관료들이 참여하는 회의 기구로 확대되면서 권력의 중심이 됩니다.
1592년 7년간 지속된 전쟁 임진왜란의 서막이 오릅니다.
일본은 수륙양면 작전을 통해 조선을 입체적으로 장악할 계획을 세웁니다.
일본 수군은 전라도 지역의 곡창 지대를 확보하여 일본 육군에게 식량을 보급하고, 육군은 부산에서부터 한반도를 빠르게 북상하며 치고 올라가는 작전입니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개전 20여일 만에 한양을 점령합니다.
전쟁 초기 조선이 이렇게 무너진 것은 크게 2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군사 시스템이 제승방략 체제였기 때문에 신속한 대응이 어려웠고 지휘관이 내려가는 시간도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본진이 무너지면 후방이 그대로 적에게 노출되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일본군의 강력한 무기 조총 때문입니다.
조총을 이용한 일본군의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부산, 충주, 한양까지 점령당합니다.
선조는 충주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의 군대마저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둘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궁궐을 버리고 평양으로 다시 국경 지역 의주까지 피란을 갑니다.
육지에서 관군이 고전한 것과 다르게 수군은 바다에서 크게 활약하면서 일본군의 수륙양면 작전이 바다에서 꽉 막혀버리게 됩니다.
조선에는 23전 23승 불패신화인 이순신 장군이 있었습니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오포 해전에서 첫 승리를 이끌어 내고 합포, 적진포,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립니다.
그해 7월 일본군의 주력 수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서 대승을 거두는데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 3대첩중의 하나인 한산도 대첩입니다.
여기서 조선의 배들을 펼쳐서 일본의 배들을 가운데로 유인해서 날개 접듯이 휘감아서 공격을 퍼붓는 학익진 전술을 통해 대승을 거둡니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간의 전란은 막을 내립니다.
임진왜란 이후 동아시아 3국과 여진은 커다란 변화를 겪습니다.
조선은 전란으로 입은 손실이 막대했습니다.
이 틈에 만주의 여진이 급속히 성장하여 명을 위협하자 명이 조선에 군사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임진왜란 때 도와준 은혜를 갚으라는 것인데 여진은 강력했고 명은 약했습니다.
명을 지원할 것인지 말 것인지 광해군의 선택은 다음시간에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글이 여러분께 도움이 되었다면 아래 영상도 클릭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상에 더 자세한 내용이 있고 좋아요는 더 좋습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8EV5WyS9C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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