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서양풍의 의미
예수회가 중국에 들여온 서양풍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왕조가 바뀌었습니다.
다행히 새 왕조도 선교사들을 신임했기에 더 많은 선교사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중국에 왔습니다.
이들은 근대 유럽의 발전된 천문, 역법, 지도 제작법, 회화 예술 등을 선보이며, 중국 사회 전반에 그 효과가 전달되기를 기대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천문을 주재하는 관청인 흠천감에서 일한 독일 선교사 요한 아담 샬과 페르디난트 할레르슈타인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선교사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와 프랑스 선교사 미셸 베누아는 황실 화가였습니다.
청나라 조정은 이들이 선보이는 천문역법 외에도 이국적 예술에 큰 호감을 보였습니다.
옹정제는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에게 유럽풍 가발을 쓴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는데 얼핏 보면 루이 14세 같았습니다.
선교사들은 흠천감 소속 기상대와 교회 등 황궁인 자금성 주변에서 활동하며 강희제 말년과 옹정제 통치 기간에 조성된 황실 정원 원명원의 새단장에도 참여했습니다.
건륭제 즉위 후에는 원명원 내에 유럽식 정원을 조성했는데, 주세피 카스틸리오네와 미셸 베누아가 설계와 감독을 맡았습니다.
1751년에는 이곳에 역사상 처음으로 분수대가 설치되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건륭제는 신장 지역에서 생산되는 힌두스탄 옥으로 만든 물건을 좋아하여 내무부에 명해 별궁인 원명원에 이것으로 만든 서역 물품들을 배치하도록 했습니다.
강희제 때 서북 몽골 지역의 부족 국가 중가르를 평정하고 건륭제에 이르러 톈산 남북지역까지 통일하자 힌두스탄 옥으로 만든 물품들이 대량으로 유입되었습니다.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은 이 옥을 지니면 평안하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풍습은 중국의 옥기 제작에 영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원나라 때는 중앙아시아, 특히 이란의 이슬람 예술 작품인 사직 카펫 등에 중국풍 그림이 스며들었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교류의 결과로 18세기에는 유럽과 중국 황실에서 로코코 예술이 가미된 중국풍과 서양풍이 환영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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