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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외교

낯선 지역 중국

by KS지식 - 문화 YouTube 2022.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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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 낯선 지역 중국]

 

15세기 이후 유럽 각국이 해외 무역 항로 개척에 나서자 선교사들이 뒤를 이었습니다.

유럽 상인들이 중국과 동방 시장에서 이윤 추구에 열중할 때, 선교사들은 중국 선교를 갈망했습니다.

예수회가 가장 먼저 나섰는데 예수회는 1540년 교황이 승인한 로마 천주교 수사회로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 각국이 중국에 호기심과 열망을 품게 된데는 이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예수회 수사 중 처음으로 중국에 온 사람은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였습니다.

명나라 후기 1584년 광둥 자오칭에 도착해 선교를 시작한 그는 현지에 적응하고자 먼저 공자와 맹자를 배우며 유학자들이 입는 옷과 두건을 썼습니다.

또한 서광계 등 당시 지식인, 정부 관리 등과 교우하며 입지를 마련한 후 점차 일반 백성에게 선교를 확대했습니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의 지리학, 지도학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1601년에는 만력제의 윤허를 받아 곤여만국전도를 제작했는데, 당시 중국인의 세계관을 잘 반영했습니다.

위치상 중국은 세계의 중심으로,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아메리카와 마주하고 있으며 대서양과는 떨어져 있었습니다.

지도에서 유럽은 태서로 북아메리카는 원동으로 표기됩니다.

이러한 지리적 서술은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의 자기중심적 인식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유럽에 보내는 서신에서 중국을 지혜로운 사람을 숭상하는 위대한 나라로 묘사했습니다.

마테오 리치는 이 나라의 현자가 모두 정치 지도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정치 지도자들은 현자의 가르침에 복종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중국을 예지로 가득 찬 이상 국가로 소개했습니다.

1585년 마테오 리치가 도착한 얼마 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예수회에 중국, 일본 선교를 명했습니다.

이에 아담 샬을 비롯해서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등지에서 선교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대부분 베이징에서 거주하면서 명에서 청으로 왕조가 바뀐뒤에도 조정의 지원 속에서 천문, 수학 등 근대 유럽 과학 기술을 선보이며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이들이 중국 과학 기술사에 미친 영향은 종교, 정치 영역보다 훨씬 컸으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1684년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6명의 선교사를 청나라로 파견했습니다.

이 중 조아킴 부베, 장 프랑수아는 강희제 측근에서 프랑스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외교적으로 우위를 점하는데 기여했습니다.

1693년 강희제는 부베를 특사로 임명하여 프랑스로 보냈습니다.

그는 중국 황제, 관리, 여성의 모습을 그린 43장의 정교한 판화를 가지고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훗날 화가 피에르 지파르는 여기에 색을 입혀 인물화 속의 현대 중국이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유럽인들은 그림 속에 표현된 중국 여성들의 온화함과 아름다운 의복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더 많은 유럽인이 중국을 이해하기 어려워진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중국과 서양에서 전통 제사 같은 의례가 종교적으로 올바른가를 두고 논쟁이 시작됐고, 중국 황제와 로마 교황도 여기에 뛰어들었습니다.

1716년 강희제는 유럽 상인편에 교황 클레멘스 11세에게 서신을 보내 이 문제의 해결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이 서신은 주홍색 글자로 써서 홍표라 했는데 한어, 만주어, 라틴어로 작성됐으며, 청 조정에서 일하던 마테오 리파, 도미닠, 파르냉,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등 16명의 선교사들이 서명했습니다.

1720년 교황은 답례로 특사 카를로 메차바르바를 중국에 파견했습니다.

강희제는 우호적으로 특사를 대접했지만, 이듬해 서양인의 중국 선교를 금지했습니다.

이후 예수회를 비롯한 다른 교파의 선교도 금지되면서 마테오 리치의 아름다운 꿈은 사라져버렸습니다.

1742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정식으로 논쟁을 금지했습니다.

선교가 어려워지자 중국에 대한 관심도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평가도 돌변하여 중국은 과거 현자가 통치하는 국가에서 부패, 정체, 유약, 교활하며 죽음을 마주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중국을 윤리 도덕과 이성이 통치하는 나라라며 열정적으로 칭송했던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도 그랬습니다.

선교 금지 조치 이후 그는 중국의 철학과 문학 수준이 200년 전 마테오 리치가 도착했을 당시와 다르지 않으며 2,000여 년동안 폐쇄되고 정체하여 어떤 과학적 발전도 없었다고 혹독하게 평가 절하했습니다.

유럽에 계몽주의가 성행하면서 선교사들이 수십 년간 공들여 쌓아온 아름다운 중국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중국 상품에 대한 불매 운동도 시작되었습니다.

지식인들은 중국 상품이 여성적이고 유약하며 고리타분한 구식 골동품에 불과하다고 깎아내렸습니다.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몽테스키외는 중국이 황제가 국민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는 전제주의 국가라면서, 특권주의에 반대하는 계몽 운동의 깃발을 높이 들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유럽 사상계에서 중국에 대한 인식은 더욱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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