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아편중독 - 아메리칸드림]
미국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는 사람들이 잘 아는 미국 대통령 중 한 사람으로 1933년 3월 4일 부임하여 1945년 4월 12일 사망했습니다.
2차 대전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네 차례 연임한, 미국 역사상 유일한 대통령이었습니다.
미국 관리들은 그가 중국에 특별히 관심을 두었으며 중국에서 사업을 했던 외조부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회고합니다.
그러나 그 사업이 바로 아편 장사였고 이 아편이 미국의 꿈을 현실화했다는 사실까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중간 이름 델라노는 외가 쪽 성을 이어받은 것이고, 이 집안은 중국 아편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인 가족 중 하나였습니다.
18세기 말 영국 동인도 회사는 중국 무역 적자를 만회하고자 아편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아편은 국적을 묻지 않고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었으며 미국 상인들도 기꺼이 여기에 동참했습니다.
초창기 아편 무역에는 존 퍼킨스 쿠싱, 새뮤얼 워즈워스 러셀, 앞서 말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외조부 워런 델라노 주니어 등이 참여했습니다.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에 중국에 온 그들은 광저우 십상행의 거부 오병감의 보호를 받습니다.
아편 무역으로 큰돈을 벌어들인 후 예외 없이 모두 조국인 미국으로 돌아가는데 그곳에서 국가 번영에 견실한 물질적 기초를 제공하고 부에 대한 정신적 가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새뮤얼 러셀은 코네티컷주의 미들타운에서 출생했습니다.
이곳은 코네티컷강의 항구 마을로 상선들은 강을 따라 내려가 뉴욕 롱아일랜드 섬 동쪽을 거쳐 대서양으로 빠져나갔습니다.
18세기에는 마을 주민 중 3분의 1이상이 무역이나 기타 해양 관련된 일에 종사했는데, 덕분에 미들타운은 코네티컷주에서 제일 번화하고 부유한 마을로 성장했습니다.
러셀의 부친도 그런 이들 중 1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러셀은 열두 살때 부모를 잃고 생계를 위해 휘틀시앤알솝사에 인턴 사원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지만 무역에 소질이 있었습니다.
인턴 기간이 끝나자 뉴욕으로 가서 고향 사람이 세운 헐앤그리즈월드사에 화물 감독관으로 취직하여 바다에서 새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업무에 익숙할 무렵,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이름을 딴 러셀사를 세웠습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자면 헐앤그리즈월드사의 무역 영업을 대리하는 명목상의 회사, 즉 페이퍼컴퍼니였습니다.
중국과의 무역이 빠르게 성장하자, 미국 동부 연안으로 산업 벨트가 형성되었습니다.
보스턴 동북부의 항구 도시 세일럼에서 남쪽으로 보스턴, 로드아일랜드주, 코네티컷주, 다시 남쪽의 뉴욕, 신시내티, 펜실베니아주의 필라델피아, 델라웨어강 일대를 거쳐 볼티모어, 워싱턴 주변을 잇는 지역이었습니다.
이곳이 중국 무역의 상품 집산지가 되자 규모가 큰 가족 중심 무역 회사와 상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창고마다 자기, 칠기, 차, 비단 등 중국, 일본, 인도에서 온 화물들로 가득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오늘날 이 지역 박물관에는 중국 자기, 칠기가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보스턴 북쪽 메인주에는 중국이라는 작은 마을과 베이징로, 광둥로가 있었습니다.
큰 호수 이름을 중국호로 지을 정도로 이 지역에서 중국 무역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주변에 좋은 대학도 많아서 북아메리카 중국 연구의 핵심지역이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러셀은 자연스레 중국에 가서 무역 일을 하기를 꿈꾸었습니다.
1819년 30세의 러셀은 캐링턴 회사의 광저우 지사에서 아편 사업등을 맡았습니다.
그는 10여 년의 경험을 통해 아편 사업이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중국 정부는 금지령을 내렸지만 각국 회사들은 다양한 경로로 아편 무역을 하면서 큰돈을 벌었습니다.
1824년 러셀은 기창양행이라는 우아한 중국식 이름의 페이퍼컴퍼니를 세우고 비단, 차, 아편 거래를 시작했는데 이 중에서 단연 아편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새뮤얼 러셀이 기창양행을 세웠을 때, 매사추세츠 출신 존 퍼킨스 쿠싱이 그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쿠싱은 광저우에서도 전도양양한 미국 상인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고 숙부인 토머스 퍼킨스의 보호 아래 성장한 그는 1803년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숙부가 운영하는 광저우 회계사무소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경험을 쌓은 쿠싱은 3년 후 퍼킨스사를 세워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고 이 회사는 30년 후 광저우 내 미국 회사 중 가장 큰 규모로 성장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쿠싱의 성공 뒤에는 오병감의 지원이 있었습니다.
오병감은 당시 세계 최대 부호 중 1명이었습니다.
1834년 개인 자산이 2,600만 은화 - 지금 가치로 수조원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상점 이화행은 이미 영미 회사들과 무역했는데 특히 미국 상인에게 지원과 보호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병감의 지원을 받은 미국 상인 중에 존 머레이 포브스와 그의 형 로버트 베넷 포브스도 있었습니다.
존 머레이 포브스는 러셀이 세운 기창양행에서 분사하여 미국으로 돌아간 뒤 철도 부자가 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1827년 오병감은 미국에서 자신의 사업을 돕던 벤저민 윌콕스가 빚을 지고 난처한 상황에 빠지자 아무 조건없이 그의 부채 7만 2,000달러를 대신 갚아주었습니다.
윌콕스는 무한한 감동을 안고 고향 필라델피아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재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아편 전쟁 후 중국은 영국과 난징 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으로 피해를 본 영국 상인들에게 300만 위안을 배상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십상행 중 가장 세력이 컸던 오병감은 혼자 3분의 1에 해당하는 100만 위안을 부담할 정도로 재력이 막강했습니다.
오병감은 대외 거래에서 곤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가 거래한 영국 동인도 회사의 경우 대량 구매를 빌미로 터무니 없이 낮은 가격을 제시했습니다.
과도한 뇌물 요구 등 청나라 관리들의 탐욕도 골칫거리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존 퍼킨스 쿠싱을 포함한 젊은 미국 상인들은 신선하게 다가왔으며 오병감은 실제로 이들에게 특별한 호감을 표했습니다.
1812~15년 사이 영미 전쟁이 발생하여 영국 군함이 미국 상선의 중국행을 막자 쿠싱의 사업은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그러자 오병감은 그에게 자신의 해외 사업을 맡겼습니다.
얼마 후 쿠싱은 오병감의 투자를 받아 터키산 아편 거래를 독점했습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에서 아편을 수입했는데 미국 상인이 끼어들 틈이 없자 터키로 눈을 돌린 것입니다.
터키에서 가져온 아편은 약 37.5%의 높은 수익을 냈습니다.
1827년 러셀의 기창양행이 파트너 자격으로 합류하면서 이 회사는 중국 내 최대 규모의 터키 아편 판매사로 고속 성장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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