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사/세계사 통합본

[세계사통합본] 4편 대항해시대- 종교개혁 - 프로이센 (56분 ver)

by KS지식 - 문화 YouTube 2022. 10. 9.
반응형
SMALL

[세계사통합본] 4편 대항해시대- 종교개혁 - 프로이센 (56분 ver)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을 완전히 무너뜨린 투르크족은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꾸고 새로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수도로 정했습니다.

이후 그들은 지중해 전 지역을 장악하고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모든 주요 통상로를 통제하면서 상인들에게서 상당한 액수의 통행세를 징수했습니다.

인도와 중국에서 서양으로 들어오는 귀한 물건들의 가격은 더욱 비싸졌고 사람들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통과하지 않고 동아시아와 거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바다만이 그 유일한 가능성으로 나타났습니다.

유럽이 서쪽 맨 끝에 위치한 작은 나라 포르투갈은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려는 항해자들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출발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에 도달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고 그들은 해를 거듭하며 아프리카의 서쪽 해안을 따라 계속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1487년에야 배 한 척이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에 도달할 수 있었는데요 아프리카는 사람들이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던 것이었습니다.

이때 이탈리아 항해자에게 단순하고도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는데요, 만약 지구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대로 둥글다면 계속 서쪽으로 항해할 경우 언젠가는 극동 지역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에서 들여온 나침반은 이런 대담한 모험을 가능하게 해 줄 중요한 항법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선구적인 생각을 한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역시 주변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샀습니다.

그는 몇 년에 걸쳐 포르투갈 왕에게 인도의 보물을 약속하며 원정에 필요한 자금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청원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콜럼버스가 다음으로 발길을 돌린 곳은 스페인이었습니다.

발견자의 뒤를 이어 정복자들이 새로운 대륙으로 몰려가기 시작했고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신대륙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교황에게 넘겨졌고 교황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신대륙의 지도를 가져오게 해서 북에서 남으로 선 하나 긋고 이 선을 기준으로 서쪽 땅은 스페인이, 동쪽 땅은 포루투갈에 속한다고 선언하면서 분쟁이 당분간 해결되었습니다.

정복자들은 오로지 엄청난 보물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아메리카로 몰려갔습니다.

특히 금에 대한 탐욕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미덕을 모두 잊어버리고 무자비한 만행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중에서도 500명의 부대를 이끌고 간 스페인의 기사 에르난 코르테스가 저지른 짓은 특히 악질적이었습니다.

인디언들에게 전설적인 아스텍 왕국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를 들은 그는 부하들을 데리고 이 왕국을 찾아 나섰습니다.

인디언들은 방어하려 했지만 스페인의 기병이 나타나거나 대포 한 방만 발사해도 기겁을 하고 달아났습니다.

인디언들은 그때까지 말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대포 소리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겐 막강한 힘을 가진 이방인들이 신으로 보였는데요 151911월 아스텍 왕국의 수도에 도착한 스페인인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아스텍인들은 이방인들을 친절하게 대접했지만 스페인인들이 보물을 훔치고 폭력을 동원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라고 강요하자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코르테스는 몬테수마를 인질로 잡고 그에게 백성을 진정시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잉카인들은 금으로 된 그릇과 예술품을 대량으로 가져왔는데 피사로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잉카의 통치자를 죽여 버렸습니다.

태양신으로 숭상되던 왕의 죽음은 잉카인들의 저항의 기세를 꺾어 놓았고 결국 잉카 제국은 스페인인들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곧이어 신대륙에서의 무자비한 착취가 시작되는데 유럽인들을 코코아, 옥수수, 감자, 토마토, 파인애플, 담배 같은 새로운 농산물을 거두어 갔습니다.

그들이 특히 눈독을 들인 것은 금과 은이었는데 이 때문에 인디언들은 광산에서 말할 수 없이 비인간적인 조건에서 일하고 비참하게 죽어 갔습니다.

유럽인들이 롬겨온 전염병과 질병도 인디언들에게 치명적인 위험이되었습니다.

추정에 따르면 신대륙 발견 이전에 중남미 지역에는 대략 7,500만 명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숫자가 1570년경에 이르면 800만에서 1,000만 명 정도로 감소됩니다.

그러나 망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농장이나 금광, 은광에서 일할 인디언들이 부족하게 되자 아프리카로 인간 사냥을 나갔습니다.

사로잡힌 아프리카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와 마치 짐승처럼 팔렸습니다.

1500년경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교회는 로마 교황의 지배 아래 통일되어 있었고 교회는 긴 세월을 거치면서 꾸준히 세속화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많은 성직자들의 관심은 예수의 가르침이나 인간 영혼의 구원보다는 돈과 사치, 권력에 쏠려 있었습니다.

교황청은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하는 데 많은 돈을 필요로 했고 16세기 초에 교황 레오 10세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호화로운 대성당을 건축하려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추가 수입원이 필요했고 떠오른 기발한 생각이 바로 면벌부 판매였습니다

교황이 파견한 설교자들은 사람들에게 면벌부를 사기만 하면 죄를 용서받고 지옥의 불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반그리스도교적인 술수에 대해 가장 단호하게 반발한 사람은 독일의 수도사이자 신학 교수였던 마틴 루터였습니다.

15171031, 루터는 95개 조항을 작성해 발표했는데요 여기서 그는 성서에 의거해 면벌부를 팔러 다니는 설교자들은 착각에 빠져있거나 아니면 고의로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논박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참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리스도 교도라면 누구나 면벌부를 사지 않고서도 오로지 신의 은총만으로 완전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루터는 적었습니다.

1521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이 사건의 최종적인 해결을 위해 고집불통 수도사 루터를 보름스에서 소집된 독일 제국회의에 소환했습니다.

루터는 성직자와 제후들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받았으나 이 자리에서도 그의 입장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운이 없었다면 이단자로 몰려 화형당하고 말았을 테지만 작센의 선제후가 곤경에 빠진 루터에게 피신처를 제공했습니다.

이에 따라 다른 제후들도 가톨릭교회에 등을 돌리고 루터 편으로 넘어갔습니다.

두 진영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적대 관계에 들어갔고 이러한 긴장은 1546년에는 급기야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협정에서 루터의 교리와 새로운 교회, 즉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가톨릭교회와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신성 로마제국의 모든 제후는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는데 종교개혁은 독일만의 얘기가 아닙니다.

스위스에서는 인문주의 교양을 쌓은 신부 울리히 츠빙글리와 제네바에 거주하고 있던 프랑스인 장 칼뱅이 종교 개혁의 불을 지폈습니다.

근면가 절약으로 재산을 늘리는데 성공한다면 그것은 영원한 구원이 가깝다는 증거가 되는데 그러지 못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게 칼뱅의 핵심사상입니다.

칼뱅이 추종자들에게 제시한 이윤 추구의 사고는 오늘날 근대 자본주의 형성의 중요한 원동력이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칼뱅의 학설은 스위스에서 독일 남부 지방을 거쳐 네덜란드, 프랑스, 스코틀랜드와 영국까지 퍼져나갔습니다.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칼뱅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청교도라고 불렀는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훗날 아메리카로 이주해 미국의 발전 과정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가톨릭교회는 사람들의 신뢰와 관심을 다시 회복하고자했고 이런 개혁이 일어났던 시기를 사람들은 반종교 개혁의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개혁의 효과로 실제 많은 사람들이 다시 가톨릭교회로 돌아왔지만 두 종교사이에 평화가 다시 찾아오기까지는 아직도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두 진영 사이의 갈등은 15728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그 비극적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이날 밤 광적인 가톨릭교도들이 약2만명의 위그노를 학살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도 신교를 영속적으로 억압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나바라 왕국에서는 위그노파로서 최초로 프랑스 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자신은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했지만 그는 1598년에 낭트칙령을 공포하여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가톨릭교도와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막강한 스페인의 통치자는 심지어 교황보다 더 열렬한 가톨릭교도라고 알려진 펠리페 2세였습니다.

결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신의 적수를 체포해 처형시켰고 펠리페 2세는 이를 빌미로 영국에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는 그전에도 이미 스페인에 대항하는 네덜란드인들의 독립 전쟁을 후원하고 영국의 가톨릭교도들을 박해한 바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펠리페 2세는 영국을 정복하고 엘리자베스를 권좌에서 몰아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중무장한 거대한 스페인 전함은 작고 기동력이 뛰어난 영국의 전함을 당해 낼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씨도 영국에 유리하게 작용했는데요 결국 1588년에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영국에 의해 전멸했습니다.

이렇게 유럽에서 가톨릭의 지배권을 확립하려던 펠리페 2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반면 영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세계 제1의 해상강국이자 식민제국으로 떠올랐습니다.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는 오히려 구스타프 아돌프를 지원했는데 이는 오랜 전쟁으로 분열되고 약화된 독일을 대신해 유럽의 강대국이 되려는 야심때문이었습니다.

30년 전쟁을 종결지은 164810월 베스트팔렌 조약은 1555년에 맺어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협정의 내용을 재확인함과 아울러 여기에 한가지 중요한 사항을 덧붙였습니다.

백성에게 군주의 종교를 따라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었고 이 협정을 통해 황제의 힘이 약화되는 대신 독일의 지방 제후들은 더욱 확고한 세력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독일은 프랑스와 스웨덴에 몇몇 지역들을 떼어주어야 했고 스위스와 네덜란드는 독립 국가가 되었습니다.

전쟁 초기에 약 1,700만명이었던 독일 제국의 인구는 전쟁 말기에는 1,000만 명 정도로 감소했습니다.

루이 14세는 1643년에 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72년간 프랑스를 통치했습니다.

재위 기록에 있어서도 그는 세계 최고라 할만하지만 물론 어렸을 때부터 나라를 다스린 것은 아니었고 후견인인 마자랭 추기경이 섭정으로 권력을 대신 행사했습니다.

1661년에 추기경 마자랭이 죽자 루이 14세는 내각을 소집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그대들을 여기 모이게 한 이유는 이제부터 내가 직접 나의 일을 관장하게 될 것임을 알리기 위해서요. 그대들은 내 곁에서 나의 자문에 응해 주시기 바라오. 라고요.

루이 14세는 왕국의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자신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들만을 주위에 불러 모았고 고위 관직이 보장되어 있다고 믿었던 귀족들을 교묘하게 무력화시켰습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는 왕의 자문역이었으므로 왕과 함께 궁정에 거처하게 되어있었지만 이렇게 귀족들을 가까이 둔 진짜의도는 그들을 더 잘 통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루이 14세가 그들에게 조언을 청하는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루이 14세는 지방의 귀족들에게도 권력을 나누어주지 않았고 모든 지방 관할 구역에 자기에게 충성하는 시민 계급 출신의 관리를 임용했습니다.

이들 중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라도 해임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세금과 관세 수입은 국고로 들어갔고 이 돈이 어떻게 쓰일지는 루이 14세가 결정했습니다.

4,000명의 조신이 그곳에서 항상 왕을 보좌했고 왕이 아침에 일어나 옷을 입을 때부터 저녁에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모든 것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궁전의 삶은 엄청나게 많은 엑스트라들과 한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연극과도 흡사했습니다.

궁전 건설에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간 것만큼이나 그 안에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하는 데도 많은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평상시에 병영에 주둔하는 대규모의 상비군도 재정 지출의 큰 부분을 차지했는데 모든 비용을 조달하는 책임은 콜베르에게 맡겨졌습니다.

국제 무역이 일종의 전쟁이라는 생각은 그에게서 나온 것이고 무역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가능한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은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구상에 가장 적합한 것은 공장의 초기 형태, 즉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에 따라 국가는 대출 이자를 경감하고 세금 혜택을 줌으로써 매뉴팩처를 장려했습니다.

매뉴팩처들은 자체 내에 여러 개의 생산 공정이 서로 잘 조율되어 있어서 고용된 수백 명의 숙련 노동자와 보조 노동자들은 양질의 의류, 양탄자, 가구, 마차, 그 외에 여러 가지 물품을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서처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1715년 루이 14세가 죽었을 때 프랑스는 대외적으로는 아직 화려해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는 나라가 되어있었습니다.

국가 재정은 엉망이었고 유럽에서 프랑스가 가지고 있던 위세는 이미 사라져가고 있었으며 국민들은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럽의 많은 군주들에게 루이 14세는 위대한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루이 14세의 생활양식과 통치 방식, 그리고 정책을 모방했고 작은 태양왕이라도 되어보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군주들의 욕망으로 고통받은 것은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평민들이었습니다.

지배자들은 특히 농민에게서 마지막 한 방울의 고혈까지 쥐어짜냈습니다.

농민은 조세를 바칠 뿐만 아니라 관저, 대수도원, 교회나 시청 등의 건설에도 부역의 의무를 이행해야 했습니다.

14세기 이후에는 명망 있는 시민들이나 지방 기사들도 이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양원으로 구성된 영국 의회의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즉 귀족과 주교들은 상원을, 지방 기사와 시민들은 하원을 구성한 것입니다.

17세기 초까지 모든 왕과 여왕은 의회에 협조적이었으므로 양자 사이에 별다른 마찰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625년에 찰스1세가 왕위에 오른 뒤부터 사정은 달라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신에 의해 나라를 다스리도록 선택되었으며 모든 결정은 자기 판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의회와 영국 국민들은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고 왕과 의회 사이의 갈등은 몇 년간 계속되었고 1642년에는 결국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스스로를 신의 전사라고 칭한 철저한 청교도주의자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은 두 번의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후 크롬웰은 자기와 함께 싸우기를 거부하고 왕과 협상하려 했던 사람들을 모두 의회에서 내쫓았습니다.

남은 사람들로 구성된 의회는 찰스 1세를 법정으로 보냈고 이곳에서 사형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크롬웰식 공화정에 넌덜머리가 나있던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왕정의 복귀를 희망했는데 강력한 의회의 존재가 왕정 복귀의 전제 조건이었습니다.

16605월 찰스2세가 의회의 권한을 존중할 것을 서약하고 영국의 새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새 국왕 역시 절대주의적인 지배자가 되려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카톨릭교회와 가까웠던 국왕이 가톨릭교도들을 관직에 중용하자 의회는 모든 공직에서 가톨릭교도를 배제한다는 법률로 왕에게 저항했습니다.

의회는 한 술 더 떠서 앞으로는 가톨릭교도가 국왕이 되는 일이 없도록 공작을 했습니다.

찰스의 딸 메리의 남편이 네덜란드의 오라녜가 윌리엄 공이라는 사실은 좋은 기회가 되었는데요 영국 의회는 그들에게 영국의 왕위를 약속하면서 그 대가로 가톨릭과의 싸움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윌리엄 공 부부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668년에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영국에 상륙했습니다.

영국 국왕은 프랑스로 피신했고 국왕의 군대는 싸우기도 전에 항복했으며 윌리엄 공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런던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 국왕은 프랑스로 피신했고 국왕의 군대는 싸우기도 전에 항복했으며 윌리엄 공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런던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즉위하기 전에 권리장전이라 불리는 문서에 서명해야 했는데 이 문서를 통해 영국의 의회와 시민들은 중요한 기본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법률을 공포하거나 폐지할 때는 반드시 의회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조세, 관세 역시 의회의 승인에 의해서만 징수할 수 있다. 의회의 결정권은 어떤 강제나 방해도 없는 상태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의회의 의원은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으며 면책 특권을 누린다. 즉 의원은 의회의 분명한 동의가 없는 한 형사 소추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회의 동의 없이는 국왕은 평화시에 상비군을 양성할 수 없다. 독립적인 법원이 법질서의 유지를 책임진다. 법원의 판결 없이는 그 누구도 처형되거나 감금되지 않는다.

이렇게 기본권리가 문서상으로 확정된 것은 1689년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영국인들이 말하는 명예혁명은 이렇게 완결되었습니다.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교를 믿는 투르크족에게 넘어간 이후, 러시아 성직지들은 정통 그리스도교, 즉 정교의 유일한 적자로 자처하면서 모스크바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제3의 로마라고 주장했습니다.

러시아는 서방 세계와 의도적으로 벽을 쌓았고 모스크바의 대공들은 자신들이 비잔티움 제국의 계승자라고 믿었습니다.

공포왕 이반 4세는 1547년에 러시아 통치자로서는 처음으로 차르(황제)의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그는 대귀족들에게서 권력을 빼앗고 토지를 몰수하고 직속 경찰을 두고 수 많은 대귀족들과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하고 살해했습니다.

이반 대제는 끔찍한 방법으로 절대주의적인 정치체제를 확립했으며 러시아 제국 전체를 자신의 사유물로 여겼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처럼 러시아에서도 교회와 국가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통치자의 보호를 필요로 했고 이러한 보호의 대가로 통치자와 그의 정책을 정당화했습니다. 차르는 신과 교회의 도움으로 신앙이 없는 나라들을 정복해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파했습니다.

러시아의 성직자들은 차르가 이러한 과업을 이행할 영도자로서 무제한의 권력을 지닌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표트르 대제가 그 다음으로 원했던 것은 새로운 서구 스타일의 도시였는데요 제국의 수도이자 동시에 발트해 연안의 항구 도시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야했습니다.

새로운 수도로 지정된 지역은 원래 홍수가 잦은 습지로서 전혀 적당한 장소가 아니었지만 수많은 농민, 노동자, 수공업자들을 동원해 작업을 강행했습니다.

이 작업은 영양실조와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쓰러져 가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 이루어졌고 이때 목숨을 잃은 사람이 약 12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표트르 대제에게 새로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서방을 향한 창문이었고 그는 이 도시를 나의 천국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서방을 모델로 한 상비군을 양성했고 해마다 3-4만명의 젊은이들이 징집되어 엄격한 전투훈련을 받았습니다.

함대도 계속 증강되어 러시아는 결국 발트해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군대뿐 아니라 국가 행정 조직 역시 새로 편성하는데요 러시아 제국을 8개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의 지사들은 제국 정부의 감독을 받고 제국 정부는 차르의 감독 아래 놓았습니다.

그리고 공훈 귀족 제도를 도입해서 서열을 출신 성분이 아니라 업적이 관리나 장교의 지위를 결정하게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왕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힘겨운 시절을 보냈는데요, 아버지 군인왕은 아들을 자기와 꼭 같은 사람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아들을 다섯 살 때부터 제복 속에 가두어 놓고 승마나 사냥, 사열, 군사 훈련 등에 함께 데리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이 왕자는 군대도, 프로이센의 미덕도 모두 몹시 싫어했고 궁정 생활과 미술, 프랑스 문학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철학을 연구하고 시를 썼으며 남몰래 플루트 연주를 했는데 아버지는 아들이 회초리로 이런 쓸데없는 짓에 시간을 낭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친구와 함께 조국을 탈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국경에서 붙잡혔고 국왕은 그들을 군법 회의에 회부해 사형 선고를 받게 했습니다.

1740년에 프리드리히가 국왕에 즉위하자 많은 사람들은 프로이센의 왕이 된 이 철학자가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릴 것이라고 기대했고 잠시 동안은 그렇게 보였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즉위하자마자 고문 제도를 없앴고, 재판 절차에 국왕이 개입할 수 없도록 했고 법정에서 모든 신분의 사람들이 똑같은 법을 적용 받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종교와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며 내가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누구나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명언을 남겼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볼 때 프리드리히는 실로 관대한 통치자였고 그가 통치하는 프로이센에서는 프로이센 특유의 복종 정신과 구별되는 새로운 사상도 싹트고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프로이센 최고의 군인이기도 했는데 사람들은 그가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상상도 하지못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영토를 빼앗을 수 있는 최초의 기회를 재빠르게 포착한 것입니다.

이 기회가 주어진 것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6세가 죽은 뒤 그의 맏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에 대한 권리만 가질 것인지 아니면 제국 전체를 계승할 것인지 여부를 둘러싸고 논쟁이 일어났을 때였습니다.

 

제 글이 여러분께 도움이 되었다면 더 자세한 내용이 있는 아래 영상도 클릭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상에 더 자세한 내용이 있고 구독 & 좋아요는 더 좋습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tQVSyhaUSH4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