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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세계사 통합본

[세계사통합본] 1. 고대문명 - 이집트 인더스 황허문명(16분 ver)

by KS지식 - 문화 YouTube 2022.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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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통합본] 1. 고대문명 - 이집트 인더스 황허문명(16분 ver)

나일강가에서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은 기원전 5,000년경 정주 형태로 생활 방식을 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나일강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데요, 여름마다 홍수가 나서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습니다.

홍수가 위협적이기는 했지만 가을에 물이 빠지고 나면 그 자리에 진흙이 남고 이 진흙은 최상의 비료가 되어 땅을 아주 비옥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나일강에 감사했고 마치 신처럼 나일강을 섬겼습니다.

나일강은 생존에 절대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주의 깊은 관찰의 대상이 되었고 평균 365일마다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의 범람 주기에 따라 일 년을 365일로 정하고 열두 개의 달로 나누었습니다.

한 달이 30일이었으므로 5일이 남았는데 그것은 한 해와 다음 해 사이에 끼워 넣었습니다.

이렇게 기원전 3,000년경의 이집트인들은 오늘날까지도 거의 큰 변화 없이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달력을 창조했습니다.

당시 나일강 유역에는 두 개의 왕국, 상류 끝의 상이집트와 나일강 하구 지역의 하이집트가 주도권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상이집트의 왕 메네스는 기원전 3,100년경에 군대를 이끌고 하이집트를 점령하여 수도 멤피스를 세우고 이집트 전체의 최고 군주가 되었습니다.

이집트의 관리들은 약 1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거대한 왕국을 다스리고 생활필수품이나 재화의 생산과 분배를 체계화하기 위해 수메르인들에게 문자를 도입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고유한 문자 체계를 개발했는데 그림과 기호가 합쳐져 만들어진 이 문자는 나중에 상형문자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단어의 원래 뜻은 성스러운 기호였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처음에는 돌 위에 문자를 새기다가, 나중에는 갈대와 유사한 파피루스 풀로 원시적 형태의 종이를 제작해 관형펜대와 잉크로 기록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집트에서 글을 읽고 쓰고 계산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상류 계층에 속했습니다.

국가의 서열 구조속에서 재상 밑의 고위층은 고위 관리와 사제였고 그 아래 서기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그래도 상인과 수공업자보다는 더 높은 지위를 누렸습니다.

무게가 최대 3톤까지 나가는 돌덩이 200만 개 정도를 채석장에서 나일강변까지 끌어다가 배에 싣고 기자로 운반했습니다.

배에서 내려진 돌덩이들을 강변에서 피라미드가 세워질 장소까지 운반하려면 우선 도로를 놓아야 했는데, 이 도로 공사에만도 1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습니다.

피라미드를 짓는 것 자체는 23년이 걸렸습니다.

나중에 발견된 수공업자 단지의 유적은 케옵스의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약 4,000명의 남자들이 상시적으로 일하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나일강이 범람하는 몇 달동안은 5만 명에서 10만 명의 농민들이 이에 가세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체력과 지레, 밧줄, 기중기에만 의지해 피라미드의 높이가 145미터가 될 때까지 무거운 돌덩이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습니다.

피라미드 바닥의 넓이는 203제곱미터로서, 이는 축구장 열 개가 들어설 수 있는 크기입니다.

피라미드 내부에 있는 파라오의 방은 사후에 닥칠지 모르는 온갖 위험으로부터 파라오를 보호해 주는 구실을 해야 했습니다.

나일강,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동쪽으로는 고대 아시아의 두 고등 문명이 비옥한 강기슭 지역에서 생겨났습니다.

기원전 2,600년 경부터는 오늘날의 파키스탄 지역에서 인더스 문명이, 그리고 대략 1,000년쯤 뒤에는 황허 유역에서 고대 중국 문명이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인더스 문명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은데 문자가 오늘날 까지도 해독되지 않아서 연구가 발굴에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발굴된 두 도시 하라파와 모헨조다로는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도시들은 엄격한 규칙에 따라 건설되었는데요 하수 시설을 갖춘 최초의 도시였고, 주요 도로들은 남북 방향으로 평행하게 뻗어 있었습니다.

욕실과 화장실이 있는 집도 있었고, 수도관을 통해 물이 공급되었고 하수는 도시 밑의 배수로로 흘러 나갔습니다.

인공적으로 만든 높은 지대 위에 세워진 성채가 도시 전체의 모습을 결정했습니다.

성벽의 안쪽에는 도시 공공시설들이 건설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가로 54미터, 세로 32미터 크기에 난방 시설까지 갖춘 실내 수영장도 있었습니다.

인더스 문명이 정점에 이른 기원전 2,000년경 하라파와 모헨조다로의 두 도시에 살았던 인구는 4만 명에 육박했습니다.

그들은 수메르인과 교류했고 그 밖에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다른 민족들과도 교역 활동을 했습니다.

아리안족은 부족 사회의 형태를 이루고 살았는데요, 가장 높은 지위를 누린 계급은 사제였고 그다음이 전사였고 그 아래 농민이 있었습니다.

정복된 원주민들은 처음에는 아리안족의 부족 집단에 속하지 않았지만 곧 농민 속에 섞이게 되었습니다.

이 다양한 신분집단은 나중에 카스트라고 불렸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세분화되어 수공업자 같은 새로운 카스트가 추가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카스트 사이의 경계는 엄격히 지켜졌고 사람들은 평생 동안 자기가 속한 카스트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전사는 죽을 때까지 전사로, 농민은 죽을 때까지 농민으로 살았으며, 이 신분은 자식들에게 세습되었습니다.

뜻밖에도 힌두교에 대한 비판은 왕자로서 호화로운 궁전에서 사치스러운 삶을 누리며 성장한 싯다르타 고타마에 의해 제기되었습니다.

기원전 560년에 태어난 싯다르타는 삶의 어두운 면을 경험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결혼을 하고 아들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병들고 늙고 쇠약한 인간들을 보게 되었고 난생 처음 죽음을 대면했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 속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풍족한 삶을 포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아직도 한창 시절, 검은 머리, 빛나는 얼굴, 행복한 유년을 누리고 이제 막 성인이 된 나이에 나는 머리와 수염을 박박 깎고 빛바랜 옷을 걸쳐 입은 채,

통곡하며 우는 부모의 만류를 뒤로하고 집을 나서 정처 없는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싯다르타는 6년 동안 속세를 떠나 은둔 생활을 하면서 삶의 모든 즐거움을 포기한 채 신과 인간,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렀고 인간의 고통은 자기가 욕망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데서 온다는 것입니다.

황허 유역의 중국인들은 이미 기원전 4,000년경터 마을이나 작은 도시를 이루고 정착 생활을 했지만 내륙 지방에는 여전히 약탈을 일삼는 유목민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수시로 황허 유역으로 몰려와 마을과 도시 주민들을 습격하면서 중국은 평화로운 때가 거의 없었습니다.

기원전 1,500년경 상나라가 오랜 전쟁 끝에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세웠을 때에도 기대했던 평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독자적으로 군대를 거느렸던 지방과 도시의 중소 군주들에게 멀리 떨어져 있는 왕의 명령은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중국인들은 대부분 외진 마을에서 가난한 농민으로 살아갔고 개나 돼지, 염소, , 닭을 길렀고 돌이나 나무로 된 간단한 연장을 사용했습니다.

기후가 특히 유리하거나 유랑하는 유목민들이 별다른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에는 상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기아와 빈곤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반면 도시 생활은 이와 아주 달랐는데요, 도시에서는 부유한 시민들이 목조 저택에서 양모, 심지어 비단으로 된 옷을 입고 지냈으며, 청동으로 만든 작은 무기나 장신구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에 비판적 생각을 가진 사람은 이미 2,500년 전에도 고위층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서로간의 전쟁이나 갈등 없이 하나의 강력한 중앙 권력 아래 통일된 제국을 이루기를 소망했습니다.

어록의 형태로 전수된 그의 가르침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이러한 우호적이고 평화로운 공동생활입니다.

공자의 기본 주장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잘 대해 주기를 바란다면 스스로도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자의 사상은 인간의 본성을 선한 것으로 보는 성선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공자에게 있어 가족은 인간성의 뿌리를 이루는 것으로 마치 아버지가 가족에게 모범을 보이듯이 제후들도 자기 백성들에게 유덕한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과 조상들에 대해서는 어떤 자세를 가지는 것이 좋은지 묻는 한 제자에게 공자는 신이나 조상보다는 이웃을 돌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대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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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FmrdLuqtS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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