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사/세계사 통합본

[세계사통합본] 3편 봉건제 - 십자군원정 - 르네상스 (28분 ver)

by KS지식 - 문화 YouTube 2022. 10. 8.
반응형
SMALL

[세계사통합본] 3편 봉건제 - 십자군원정 - 르네상스 (28분 ver)

이집트의 파라오에서부터 로마의 황제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방안들이 시도되었습니다.

샤를마뉴 대제는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독자적인 길을 개척했는데요 게르만 전통을 토대로 중세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게 될 새로운 지배 구조와 사회 형태를 창조한 것입니다.

황제는 제국의 방위와 효율적인 행정을 위해 협력을 필요로 했으므로 가신이라 불리는 충성스런 신하들을 뽑아 제국에 봉사하게 하고 보상을 제공했습니다.

가신들이 황제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받은 것은 금전이 아니라 토지와 그 토지에 딸린 농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봉토라고 불리는 이런 토지는 황제가 하사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빌려준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즉 가신들은 황제에게서 땅을 임차한 봉신이었습니다.

중세 초기에는 아직도 모든 땅이 황제에게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황제는 봉토를 후하게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

가신들은 자기 아래 가신들에게 다시 봉토를 나누어 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봉토를 받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가신의 가신들 역시 가신을 거느리기도 했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봉건 영주나 가신의 자격 조건, 그들이 져야 할 의무와 권리를 확정하는 봉토에 관한 규정이 만들어졌습니다.

양쪽 모두 서로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을 했습니다.

피라미드의 정점에는 황제가 있고 그 아래로는 황제로부터 직접 봉토를 받은 제국 제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그 밖의 귀족, 주교, 수도원장과 함께 사회의 최상 계층을 형성했습니다.

그 다음에 오는 것은 기사, 관리, 부유한 시민, 수공업자였는데 맨 아래 자리를 차지한 것은 농노와 예농이었습니다.

농노는 토지에 딸려 있는 존재였으므로 이주의 자유가 없었고 봉건 영주라 해도 이들을 임의로 장원에서 쫓아내거나 팔아넘길 수 없었습니다.

농노는 영주의 소유물이 아니었기 때문인데요, 예농의 경우는 이와 달랐습니다.

그들은 마치 노예처럼 인격체가 아니라 일종의 물건으로 취급되었으며 짐승과 다름없이 다루어졌습니다.

농민은 영주에게 수확의 일부를 바치고 고기와 치즈, 우유, 계란, 채소 등을 정기적으로 공급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부역의 의무도 있었는데요, 영주 소유의 들판이나 밭, 삼림지에서 무보수로 일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아이들도 집안과 농장에서 일을 해야했고 결혼 시기도 아주 일러서 딸은 빠르면 열세 살에, 아들은 열여덟 살에서 스무 살 사이에 혼인을 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한 부부는 평균 여섯 명 내지 여덟 명의 아이들을 낳았지만 그 가운데 두 명 이상 살아남는 경우도 흔치 않았습니다.

여자들은 아이를 낳다가 생명을 잃는 일이 많았고 설사 그런 불행을 피해도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잦은 임신과 힘든 노동으로 허약해진 몸은 질병을 견뎌 내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과 무지 속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갔는데 몇 세기가 지나도록 이 점에서는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1620년에 발표된 그림멜스하우젠의 작품 속에서 열세 살짜리 소년은 자기가 더 어렸을 때는 하늘에 있는 신에 대해서도 들어 보지 못했고 농가 뒤에 어떤 다른 시계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처음에 이 세상에는 부모와 집 안의 일꾼들만 살고 있는줄 알았다고 합니다.

교회 권력과 세속 권력의 관계를 어떻게 조절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기나긴 대결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카롤링거 왕조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오토가문과 잘리어 가문에서 나왔습니다.

가들은 이 세상의 지배자로서 아주 자연스럽게 수도원장과 주교의 임명권을 행사했습니다.

1039년에서 1056년까지 재위했던 하인리히 3세는 한 술 더 떠서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교황들을 퇴위시키기까지 했는데 이러한 처사는 많은 성직자들을 격분케했습니다.

하인리히 3세가 서른아홉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그의 어린 아들 하인리히 4세가 왕위에 오르자, 성직자들은 이때를 반격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황제의 간섭을 배제하고 일곱 명의 추기경에 의한 교황 선출 제도를 관철시켰고 1075년 새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더 많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교황이 독점하는것이었는데 하인리히 4세는 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리인 서임권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황제의 지위가 약화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인데요 그는 측근들과의 숙의 끝에 교황의 폐위를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신하들이 황제에게 한 충성 서약을 무효화했는데 이런 전례없는 사태에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황제가 마치 범죄자처럼 취급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리히 4세의 파문은 곧 그 효과를 나타냈습니다.

스스로 추방당할 위협에 내몰린 많은 제후들이 교황의 편으로 넘어갔고 황제의 힘이 약화된 틈을 타 자기들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점점 더 심한 압박을 느낀 끝에 교황과 화해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찾아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카노사의 성에서 참회복을 입고 교황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했는데 교황은 참회하는 죄인을 다시 교회의 품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황제 하인리히 4세의 힘겨운, 하지만 현명한 선택은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책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일로 교황은 황제와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 하인리히 4세는 유리한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고 그레고리우스에게 대항하는 다른 교황을 내세웠고 이 교황에 의해 베드로 대성당에서 황제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미 그 당시 사람들도 이런 방식으로는 주교 서임권 논쟁이 매듭지어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결을 위한 양측의 노력이 시작되기까지는 수십 년의 세월이 더 흘러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나중에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 협상의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교황과 황제는 결국 1122년에 보름스 종교 협약으로 불리는 조약을 통해 일정한 타협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조약은 종교 권력과 세속 권력의 관할 영역과 권리를 확정했고 훗날 정교 분리라고 불리게 될 원칙의 확립을 향한 중요한 일보가 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동시에 교황에게 그리스도교 최고 수장의 지위를 확실히 보장해 주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교황에게 도움을 청했고 1095년 교황은 선동적인 말로 모든 그리스도 교도들에게 투르크족에 맞서 싸울 것을 촉구합니다.

저주받을 민족, 신을 모르는 타락한 민족이 그리스도 교도의 땅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불태웠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믿음이 없는 자들에 대항하여 무기를 드는 사람은 모든 죄의 형벌에서 완전히 면제되며 성스러운 투쟁에서 전사하는 사람은 영원한 삶을 보장받을 것이다. 라고요.

교황의 호소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본래 귀족이나 기사 계급을 향한 것이었으나 이들뿐 아니라 농부와 수공업자들 심지어 여자들까지도 열렬히 호응했습니다.

하지만 성스러운 전사들의 동기는 아마도 힘겨운 삶으로부터 무작정 탈출하고 싶은 심리, 전리품을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 그리고 구원에 대한 진정한 믿음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었을 것입니다.

유럽 전역에서 병력이 모여들었고, 10968월 십자군의 깃발 아래 팔레스타인으로의 행군이 시작되었습니다.

혹독한 3년이 지나 최초의 십자군이 목적지에 도달했고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이슬람교도들과 유대인들을 끔찍하게 학살했습니다.

투르크족은 성지에서 추방당했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십자군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건설하거나 심지어 작은 독립 국가들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주위의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위협을 느꼈으므로 계속 서방 세계의 지원을 요구했습니다.

동양과 서양 사이의 무역은 십자군 전쟁 때 이미 눈에 띄게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네치아, 피사,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들은 교역의 중심지로서 부와 권력을 키워 나갔습니다.

많은 상품들 외에 의학과 자연과학에 관련된 지식, 아라비아 숫자 체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랍인들에 의해 보존되고 전승된 고대의 유산들이 서유럽으로 넘어왔습니다.

십자군원정은 원래 의도와 정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리스도 교도들은 미개한 이교도들의 손아귀에서 성지를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미개한 이교도들이 자기들보다 훨씬 더 발전된 문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했습니다.

그리스도 교도가 이슬람교도에게 배울 것은 많았고 결과적으로 서양은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많은 이득을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신앙과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싸워야 했는데 약한자, 가난한 자들을 돕고 도덕적 흠결이 없으며 믿음, 의리, 고결함, 너그러움, 용기 등의 덕묵을 갖춘 사람이라야 진정한 기사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론상으로는 모두 좋은 얘기이지만 기사들이 성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모두 그렇게 살수 없었고 그렇게 살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약탈도 했습니다.

성에서의 생활은 불편할 뿐만 아니라 아주 따분했는데 겨울은 더욱 그랬습니다.

여흥을 위해 마상 무술 경기나 축제가 열렸고 가인들은 음악을 연주하며 시나 이야기를 읊었습니다.

당시까지 중세 문학을 지배한 종교 시인들이 교양어인 라틴어를 사용한데 반해 기사들은 민중의 언어로 된 문학 작품을 창조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에서는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들에 관한 소설이, 그리고 독일에서는 니벨룽의 노래가 생겨났습니다.

기사 시대의 전성기는 13세기에 막을 내렸고 바로 이 시기에 도시가 번창하고 시민 계급이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결정적인 요인은 급격하게 증가한 교역이었습니다.

중요한 통상로가 교차하는 요충지, 하구와 항구, 성이나 수도원 인근 지역 등 도처에서 시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들이 형성되었습니다.

상인, 수공업자, 농민들은 도시로 와서 자기 물건을 팔았는데 그전에 미리 도시의 권력자인 성직자나 제후에게 시장 사용료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1세기와 2세기 사이에 로마인에 의해 고향에서 쫓겨난 후 세계 여러곳에 흩어져 소수 민족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유의 신앙, 관습, 풍속을 통해 강력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것이 사회의 주류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중세 도시에서 그들은 게토라고 불리는 폐쇄적인 주거 지역에 모여살았고 1215년에는 심지어 유대인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복장 규정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이 규정에 따라 유대인들은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옷에는 노란 점무늬를 기워 넣어야했습니다.

이미 중세 시대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폭력, 살인, 박해 행위가 빈번히 발생했습니다.

이 시대에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집단은 상인 계층, 그 중에서도 특히 원거리 무역에 종사한 상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소규모의 공장을 세웠는데 14세기에 벌써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최초의 은행이 이들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이나 독일의 푸거 가문 같은 초창기 자본가들은 황실이나 교황청에까지 돈을 꾸어 줄 정도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이로 인해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중세에 건축술이 발전하고 최초의 대학들이 설립된 것도 도시의 번영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프랑스에 해방을 안겨다준 잔 다르크는 교회의 중개 없이 신을 직접 만났다는 점과 몸무게 미달이 그녀가 마녀로 몰린 이유였습니다.

전쟁과 혹독한 가난, 십자군 원정, 마녀 사냥에 이어 흑사병까지 덮쳤는데 최악의 재앙으로 14세기에 흑사병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은 유럽 인구의 약 3분의 1에 달했습니다.

지나간 시대를 암흑의 시대라고 명명한 중세 말과 근세 초기의 사람들은 마음속에 이 모든 끔찍한 현실을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운명과 세상사란 신에 의해 정해진 숭명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15세기에 이런 전통적인 세계관을 탈피하려는 노력이 학자와 예술가들에 의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막연하나마 더 나은 시대에 대한 예감을 갖고 있었지만 미래를 전망하기보다는 일단 과거, 즉 현재의 세계보다 더 밝아 보이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돌아보며 이를 모범으로 삼았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르네상스라고 불리게 된 것은 이런 연유였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내세를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은 이제 그 효력을 상실했습니다.

현세가 중시되고 인간 자체가 학문과 예술의 중심적인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지식인들은 고대 사상의 바탕 위에서 인간이란 단순히 전체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하나의 목적인 존재라는 관점에 도달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권을 지니며,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계발하고 발전시킬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한 필수 조건으로 요구된 것은 고대를 모범으로 한 포괄적인 교양 교육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사상은 당시 유럽 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태동했고 그 중심에 놓인 것은 인간이었기 때문에 인문주의라고 불리게 됩니다.

독일 마인츠 사람인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1450년에 금속 활자를 이용해 책을 인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기술을 통해 필사나 목판 인쇄를 할 때보다 훨씬 더 빠르고 저렴하게 책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고 인쇄 부수를 아무리 늘리더라도 인쇄의 질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구테베르크의 인쇄술이 과학과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 바를 생각하면 훗날 프랑스의 시인 빅토르 위고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가리켜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한 것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습니다.

 

 

 

제 글이 여러분께 도움이 되었다면 더 자세한 내용이 있는 아래 영상도 클릭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상에 더 자세한 내용이 있고 구독 & 좋아요는 더 좋습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aYcC4SMQAsc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