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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세계사 통합본

[세계사통합본] 2편 아테네 - 로마 - 프랑크왕국 (43분 ver)

by KS지식 - 문화 YouTube 2022.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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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통합본] 2편 아테네 - 로마 - 프랑크왕국 (43분 ver)

고대 그리스라는 말이 통일된 하나의 나라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기원전 700년경, 그리스는 산맥의 기슭이나 해변 또는 섬의 비옥한 평지에 형성된 수많은 소국가들로 쪼개져 있었습니다.

이들 소국가는 각각 하나의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도시 국가라고 불렸고 그리스인들 자신은 폴리스라는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모든 폴리스는 다른 폴리스에 대항해 독립과 자유를 지켜 나가야 했고 이를 위해 폴리스마다 구내가 조직되었고 전쟁도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주도적인 도시 국가로 발전한 것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였는데요, 두 국가의 발전 경로는 서로 달랐습니다.

펠로폰네소스반도 남쪽에서는 스파르타가 잘 훈련된 군대의 힘으로 다른 도시들을 차례차례 정복하면서 스파르타인이 아닌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노예 생활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 때문에 소요와 봉기가 그치지않아 수적으로 압도적인 노예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거의 모든 스파르타 남자들이 군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폭동을 일으킨 노예들이 진압되고 난 다음에도 스파르타인들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계속 군인으로 살아갔습니다.

남자는 어렸을 때부터 전투를 위한 교육을 받았고 사내아이는 일곱 살이 되면 부모를 떠나 훈련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때 신발을 신는 것이 금지되었고 가벼운 옷차림만 허용될 뿐이었습니다.

노예로 몰락한 빈농들은 해방되었고 부채를 진 시민을 노예로 매매하는 것이 금지되고 부채 탕감 조치도 취해졌습니다.

전임자인 드라콘이 공포했던 엄격한 형법은 폐기되었습니다.

솔론의 개혁 입법 가운데서도 이후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더 이상 신적인 왕이나 소수 귀족 집단이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결정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규정이었습니다.

시민들은 적어도 일년에 40차례 민회를 열어 폴리스의 모든 주요 사항을 토론하고 법률 제정이나 전쟁과 평화에 대한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상시적인 정부 업무를 담당하는 위원회도 설치되었는데, 그 위원으로는 명망 있는 시민들이 선출되었습니다.

또 독자적인 국민 재판소가 법률의 이행을 감시했고 이로써 솔론은 완전히 새로운 지배 형태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것이 국민에 의한 지배, 즉 민주주의이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아직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아테네 사람 가운데 실제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남자 자유 시민이라는 소수 집단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아테네의 시민이라는 말은 바로 그들만을 가리키는 것이고 여자들은 지배적인 견해에 따르면 공적인 생활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고 가정에 속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정치적 권리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노예와 타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배제되었지만 이런 정치 체제는 당시로서는 놀랄 만큼 진보적이었습니다.

인간의 사유는 종교적인 제약에서 해방되어 독자적으로 발전했고 인간과 신, 하늘과 땅에 대한 새로운 사상이 생겨났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서양 사상의 기본 틀을 결정지은 세명의 철학자가 기원전 470년에서 32년에 이르는 시기에 아테네에서 배출되었습니다.

바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들입니다.

예술과 건축 부문에서도 아테네는 새로운 척도를 제시했는데요 아크로폴리스의 신전, 이 신전 내부와 아테네의 여러 광장에 세워진 조각상들은 서양 건축과 조각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또 최초의 세계 문학이 그리스 시인들에 의해 창작되었는데요 호메로스의 영웅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세계 문학의 고전 중의 고전입니다.

아테네의 남자 어린이들은 현대적 의미의 학교를 다닌 최초의 학생이라고 할수 있는데 이들은 일곱 살에서 열네 살까지 학교에 다니며 읽기와 쓰기, 셈하기를 배웠고, 음악도 중요한 과목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모든 소년들이 플루트나 리라를 연주 할 수 있어야 했고 성장하면서 말하는 기술 즉 수사학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리스 문학 특히 호메로스의 영웅 서사시를 공부했으며 그 가운데 중요한 대목은 암기했습니다.

졸업 후에도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기원전 776년 이후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경기에 참가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올림픽에 출전한다는 것은 그리스 시민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영광이었고 올림픽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폴리스 간의 전쟁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리스 전역에서 모여든 최고의 선수들이 실력을 겨루기 위해서는 평화가 유지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승자는 찬미의 대상이 되었고 고향에서는 영웅처럼 환영받았습니다.

폴리스는 세금을 면제해 주고 평생의 생계를 보장해 주며 극장에서 귀빈석을 제공하는 것으로 고국의 영예를 높인 영웅들에게 보답했습니다.

기원전 510년 로마인들은 반란을 일으켜 증오의 대상이던 에트루리아 왕을 쫓아냈고 아테네인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인들도 더 이상 한 명의 왕에 의한 통치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제가 적합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기에 로마인들은 결국 중간적인 방법을 택했는데 선거를 통해 두 명의 집정관이 이끄는 시 정부를 구성한 것입니다.

집정관의 임기는 일 년에 그쳤고 집정관 한 명이 다른 집정관의 동의 없이 단독으로 사안을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한 사람의 권력이 너무 비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였지만 어차피 핵심적인 권력은 부유하고 명망 있는 세습 귀족 가문 출신의 남자들이 종신회원으로 소속되어 있는 원로원이 쥐고 있었습니다.

물론 평민 남자들도 민회에서 발언하거나 법안 표결과 시 정부 선거에 참여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에서는 모든 표가 같은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었는데요 선거 제도는 항상 부유층의 목소리가 다수가 되도록 교묘하게 짜여 있었고 모든 결정이 그들의 뜻과 의지에 맞게 내려졌습니다.

따라서 로마의 국무 즉 국민 전체의 공동 사안은 차라리 부유층을 위한 부유층의 문제였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로마의 법제는 훗날 전 세계 법질서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새로운 지배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가 단지 여러 도시들 중 하나라는 사실에 만족할 수 없었고 로마는 이탈리아 최고의 도시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 목표를 위해 강력한 군대를 동원해 전쟁을 거듭하며 영토를 넓혀 나갔습니다.

마침내 기원전 270년경에 로마는 인구 약 300만 명의 이탈리아를 대부분 통치하게 되었고 점령된 도시들은 내정에 자치권을 가지고 고유한 관습과 종교를 유지했습니다.

이들의 의무는 로마에 세금을 내고 전시에 군대를 제공하는 것이었고 로마인들은 이런 느슨한 점령을 통해 반란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피정복민들이 로마의 법률과 효과적인 행정 아래서 이전보다 더 나은 생활을 누리는 경우도 적잖았습니다.

로마인들은 이탈리아의 남쪽 끝까지 정복하고 나서 시칠리아도 공격했고 이렇게 로마는 당시 지중해 서부 지역 최대의 해상 제국이자 무역 강국이었던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와 충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엄청난 피해를 일으킨 일련의 전쟁이 기원전 264년에 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노예들이 투입된 대단위 농장에서 농산물을 대량으로 값싸게 생산했기 때문에 농민들은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생활을 기대하며 도시로 이주했지만 수공업자나 상인들은 임금을 줄 필요가 없는 노예들을 부릴 수 있었으므로, 일자리는 거의 없었습니다.

예전의 농민들은 이제 직업 없는 프롤레타리아로서 그날그날 생존을 부지하기 위해 분투해야 했고 역사상 최초의 도시 무산자 계급이 되었습니다.

일부 세습 귀족조차 이러한 사회 변동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는데 그라쿠스 형제도 그러한 귀족에 속했습니다.

그들은 개인의 토지 소유와 재산 소유를 제한하고 몰락한 농민과 그 가족들이 다시 생계를 이어 갈 수 있도록 토지 개혁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원로원은 어떤 종류의 개혁에도 반대했고 그라쿠스 형제를 국가 질서를 위협하는 민중 선동가로 간주했습니다.

기원전 133년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민회에서 연설을 하다가 맞아 죽었고 300명의 추종자도 그와 함께 죽음을 당했습니다.

12년 뒤에는 그의 동생이 가이우스 역시 죽어야 했고 그의 휘하에 있던 3,000명이 넘는 사람들도 처형당했습니다.

로마는 형식적으로 여전히 공화국이었으나 카이사르라는 사실상의 전제 군주에 의해 통치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는데 불과 일년뒤에 그는 원로원 회의 도중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암살되었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르가 죽은 뒤 후계 문제와 앞으로의 정치 체제 향방을 둘러싸고 다시 수년 동안 분쟁과 대립이 있었습니다.

결국 카이사르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가 패권을 잡았고 기원전 27년에 원로원은 그를 국가 제1시민으로 임명했습니다.

그에게는 군의 최고 사령관을 뜻하는 임페라토르라는 칭호가 주어졌고 여기에 신성한자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예 칭호도 덧붙여졌습니다.

또 그는 카이사르의 후계자였기 때문에 황제를 뜻하는 단어 카이저는 카이사르라는 이름에서 유래했는데 이 이름을 부여받았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최후를 교훈으로 삼아 권력을 과시하는 대신 원로원과 민회의 구성원들이 로마의 미래를 좌우하는 것은 바로 자신들이며 그 때문에 공화국이 다시 제대로 돌아간다는 확신을 갖고 일을 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로마군과 국가 재정을 장악하고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뜻에 반하여 결정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로마 공화국은 모든 권력이 황제에게 집중된 군주제 국가가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오랜 통치 기간에 이러한 절대 권력을 이용해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특히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시인들을 궁전으로 불러들여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로마는 가능한 한 신속한 군대 이동을 목적으로 이미 일찍부터 튼튼한 도로를 건설했는데 이러한 도로망은 교역의 발달에 좋은 조건을 제공했습니다.

또 선박과 항구 시설도 이제 평화적인 목적으로 개조되고 확장되어 역시 교역에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수도 있지만 로마의 점령은 점령 지역에 엄청난 혜택과 전례 없는 발전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도시들이 건설되고 확장되었고 도시 중심에는 포럼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정치 집회나 재판이 열렸습니다.

작업장, 상점, 숙박업소, 공공 목욕 시설 등도 전형적인 도시의 모습을 이루는 요소들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수많은 건축물과 수도관은 당시 로마인들의 탁월한 건축 기술을 보여줍니다.

권력과 재산을 가진 사람들은 최고 시설을 갖춘 대저택에서 살았는데 이런 집들은 공공 상하수도 시설과 연결되어 있었고 목욕탕과 바닥 난방 시설을 갖추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노예의 시중을 받으며 삶을 만끽했고 평범한 민중들에게는 삶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농민과 노동자 계층은 겨우 연명하기 위해서 고되게 일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도시의 집값은 때때로 너무 비싸서, 병영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임대 단지에 단 한칸의 방을 겨우 빌려 사는 가정이 많았습니다.

서기 284년에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 제국을 4구역으로 분할하고 각 구역마다 한 명의 통치자를 두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제국을 더 효과적으로 다스리고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각자 군대를 소유하게 된 4인의 통치자들은 곧이어 서로 싸우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제국 전체는 더욱 약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이르러서야 4구역으로 분열되어 있던 로마가 다시 통합되었고 313년에 로마 제국의 안정을 위해 종교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된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이런 조치는 그리스도교 세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는 그의 보호아래 로마의 주요 종교가 되었고 이어서 그는 또 하나의 중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324년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하고 이곳에 로마 제국의 새 수도를 건설한 것입니다.

전략적으로 유리한 보스포루스 해협에 위치한 이 도시는 동쪽과 서쪽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 도시에 화려한 건축물과 시설을 세우고 로마의 지배 질서에 그리스도교 교리, 그리스 및 동방의 문화를 접목시켰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 제국의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고 제국의 동방 지역은 곧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 중요성에 있어서 서쪽을 능가하게 되었습니다.

제국의 동쪽에서는 그리스 정교가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걷는데요 그리스 정교의 수장은 황제였습니다.

황제는 신의 대리인으로 간주되었고 초상화 속에서는 머리 위에 후광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갓 태어난 그리스도교가 분열된 것처럼 로마 제국도 395년에 동서로 분할되었습니다.

제국의 서부는 게르만족의 지속적인 침략 속에서 약해질 대로 약해져 도저히 회생할 길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476년에 마지막 황제가 물러나면서 서로마 제국은 마침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은 숱한 외부의 공격을 받으며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 1,000년을 더 존속할 수 있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의 예술가와 학자들은 서쪽에서 점차 잊혀간 고대의 유산들을 보존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예수는 열두 살 때부터 벌써 신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토론을 벌였는데, 이때 사람들은 그의 슬기로운 대답에 경탄했다고 합니다.

예수는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들었고 곧이어 스스로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들이 신의 자식이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어떤 인간이든, 또 그가 어떤 행동을 했든 상관없이 모두 똑같이 사랑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신의 사랑은 무한하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자는 누구든지 용서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유대교의 사제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는 어렵고 복잡한 말 대신 단순한 민중의 언어로 이야기했습니다.

또 신의 계명을 농부와 어부, 순종하지 않는 아들과 잃어버린 양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표현했으므로 그의 말은 아이들조차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성서에 따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의 추종자들이 많이 생겨났는데, 특히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중에서 예수를 따르는 이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곧 도래할 신의 왕국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열성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에 따르면 이 왕국에서는 평화와 정의가 지배하고 모든 인간들은 형제와 자매처럼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가 세상에 알려지고 그의 가르침이 확산되자 유대교 사제들은 위기를 느꼈고 또 로마 정부 당국의 입장에서도 예수는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또 로마 정부 당국의 입장에서도 예수는 불편한 존재였고 결국 옛는 자신의 신념을 펼친 대가로 모욕과 멸시 속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예수가 태어난 지 570년쯤 지났을 때 아라비아의 사막 촌락 지역인 메카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무함마드였고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읜 후 아랍 상인들 밑에서 일하면서 대상들과 함께 여러 곳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다양한 종교와 믿음을 가진 이방의 도시와 사람들을 알게 되었는데 이때 유대교도와 그리스도교 교도들이 들려준 유일신에 관한 이야기가 젊은 무함마드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참된 신은 실제로 단 한 명밖에 존재할 수 없다는 확신에 이르렀고 이 신을 알라라고 불렀습니다.

무함마드는 서른 살부터 마흔 살이 될 때까지 명상을 위해 자주 메카 근처의 산중 동굴에 칩거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그가 유일하고 참된 신 알라의 뜻을 세상에 알릴 사람으로 선택되었다는 계시를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최초의 계시에 또 다른 계시가 계속 이어지자 처음에는 회의를 품었던 무함마드도 메카 사람들에게 자신이 받은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 세계에는 단 한 명의 신, 즉 알라만이 있다고 가르쳤고 자신이 바로 그 신이 보낸 예언자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새로운 복음을 받아들였는데 무함마드는 박해 때문에 목숨의 위험을 느꼈고 결국 622년에는 추종자들과 함께 메디나로 피신했습니다.

아랍어로 헤지라라고 불리는 무함마드의 피난은 이슬람교의 원년을 이룹니다.

메디나에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주위에 많은 추종자들이 모였고 무함마드는 이제 종교 지도자에 그치지 않고 이맘 즉 정치 지도자로 부상하기에 이릅니다.

무함마드는 죽기 전까지 아라비아의 모든 종족들을 자신의 교리 아래 끌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쿠란에 기록된 이교리는 이슬람이라고 불리는데 이슬람은 신의 뜻에 복종함 또는 신에의 헌신을 뜻하는 말입니다.

쿠란은 이슬람의 성서로서 신도들의 생활 지침을 일상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아주 세세하고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기도문은 물론이고 기도의 횟수와 방식도 정해져 있고 음식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않아야 하는지, 단식은 언제 어떻게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지, 그런 행동을 했을 때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지 등등 이 모든 내용들이 쿠란에 적혀 있습니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잇는데요 다만 이슬람교는 세속 국가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종교적 공동체에 머무르지 않고 그 이상이 되고자 한다는 점에서 나머지 두 종교와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쿠란은 종교 생활만이 아니라 인간 생활 전체를 규정하며 그 속에서 종교와 정치, 교회와 국가, 종교적인 삶과 세속적인 삶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전체로 간주합니다.

오늘날까지도 이슬람 사회와 국가의 특징은 이러한 교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지켜지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슬람 사회는 역사상 종종 그랬듯이 개방적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권위적이고 폐쇄적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십진법과 숫자 표기법은 인도에서 만들어져 아랍상인들에게 전해졌고 그 숫자를 통해 편리하게 계산하는 것을 본 유럽인들의 눈에 띄어 전파되었습니다.

사유를 통해 세계를 설명하고자 했던 고대 그리스인들과는 달리, 아랍 학자들은 주로 실제 실험을 중시했고 그결과 물리학과 화학 분야에서 많은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태양, , 행성들의 궤도를 이미 꽤 정확히 계산해 냈고 지구가 원판이 아니라 구체임을 증명했습니다.

이러한 발견은 항해술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고 아랍인들은 의술 분야에서도 선도적인 업적을 남겼습니다.

5세기 서로마 제국이 붕괴되고 난 후 유럽의 대부분은 게르만족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게르만의 여러 종족들은 결코 좋은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쟁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이때 프랑크족의 교활하고 무자비한 군주 클로비스는 군사력으로 영토를 점점 더 확장해 갔고, 결국 500년경에는 대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훗날 프랑스, 독일, 베네록스 3국인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가 갈라져 나옵니다.

클로비스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여 세례를 받았고 신하들에게도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프랑크 왕국의 공식 종교가 되긴 했지만 이교적 관습과 풍속이 바로 폐지되지는 않았습니다.

카롤링거 왕조의 지배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로마 교황의 지지를 얻어 내고 프랑크 왕국의 주교들에게 성유로 축성을 받았습니다.

이로써 피핀은 프랑크 왕국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 종교, 교회를 한데 결합시켰는데 이러한 결합 방식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왕과 황제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왕과 황제들은 자신들이 신으로부터 통치권을 부여받았으며 신의 법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771년에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는 함께 나라를 다스리던 동생 카를로만이 죽은 뒤 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군주가 되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처음부터 모든 게르만족을 아우르는 하나의 통일 왕국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바이에른과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드족이 정복된 후 남은 것은 이교도인 작센족뿐이었습니다.

그들은 32년 동안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저항했지만 결국 굴복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이로써 샤를마뉴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고 그가 800년의 성탄절에 로마 교황으로부터 로마황제의 관을 받음으로써 서로마 제국은 수백 년 만에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샤를마뉴는 스스로를 위대한 로마 황제들의 후계자이자 그리스도교 세계의 세속적 지도자로 간주했습니다.

곧이어 그는 대제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는 결코 과분한 칭호

큰 아들인 로타르는 심지어 아버지 루트비히의 퇴위를 선언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했고 불만을 품은 나머지 두 형제는 로타르에 맞서기 위해 동맹을 맺었습니다.

경건왕 루트비히의 서거 후 세 아들은 제국을 각각 3분의 1씩 물려받았습니다.

초기에는 그들 모두 제국의 통일성을 유지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이러한 분할 상속은 카롤링거 왕국의 종말을 의마하는 것이었습니다.

로타르가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그의 영토는 대부분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으로 넘어갔습니다.

이 두 프랑크 왕국의 국경선은 유럽의 중심 지역을 양분하는 경계가 되었습니다.

동프랑크 왕국의 제후들은 936년에 작센가의 오토 1세를 왕으로 선출했는데 이것이 독일 역사의 시작이었고 서프랑크 왕국은 훗날 프랑스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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