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통합본] 5편 프랑스혁명 - 나폴레옹 - 식민지쟁탈전 (49분 ver)
18세기 말, 유럽 몇몇 국가에서는 소요와 혼란이 일어났는데요 시민과 농민들이 지배 계급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저항의 움직임이 가장 거센 곳은 프랑스였는데 당시 프랑스에서는 귀족과 고위 성직자, 부유한 시민들로 이루어진 상류층과 일반 민중 사이에 엄청난 격차가 벌어져 있었습니다.
여기에 부유층에 대해서는 세금을 거의 면제해 주고 세 부담을 빈곤층에게 전가하는 불공평한
조세 제도가 한몫을 했습니다.
국가 재정은 엄청난 군비 지출과 호화로운 궁정 생활로 인해 파산 지경에 이르렀고 시급하게 돈이 필요했던 루이 16세는 늘 그랬듯이 조세 인상을 계획하고 이로 인해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1789년에 삼부회를 소집했습니다.
삼부회는 1614년 이후 한 번도 소집된 적이 없는 신분 대표 회의로서 루이 16세는 여기서 조세 인상에 대한 동의를 받아 내고자 했습니다.
제1신분인 성직자 계급과 제2신분인 귀족 계급은 삼부회에 각각 300명의 대표를 참석시켰습니다.
제3신분을 이루는 시민과 농민은 전국민의 98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국왕과의 오랜 협상 끝에 겨우 600명의 대표를 내보낼 수 있었습니다.
삼부회의 첫 회의에서 당장 논란거리가 된 것은 표결에 있어서 세 신분 집단에게 동등한 결정권을 부여할 것인가 아니면 참석한 모든 개인에게 동등한 결정권을 부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제3신분과 몇몇 하위 성직자 및 귀족들은 개인별 표결을 요구했지만 루이16세는 이를 거부하고 신분별회의와 표결을 명령했습니다.
제3신분의 대표들은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1789년 6월 17일, 민의회를 소집하고 귀족 대표와 특히 하위 성직자 대표들이 이에 동조했습니다.
국왕은 베르사유의 회의장 앞에 군대를 집결시켰고 국민 의회 의원들은 6월 20일 테니스 코트에 모여 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습니다.
루이 16세는 직접 의원들 앞에 나서서 그들의 행동을 벌법으로 규정하고 다시 신분별로 헤쳐 모일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에 대해 국민 의회 의장 장 바이는 국민의회는 어떤 명령도 받을 이유가 없다고 응수했습니다.
그의 말은 절대주의에 대한 거부와 국민 주권의 원칙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었고 이것이 바로 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민중에게 바스티유 감옥은 폭정과 전제 정치의 상징이며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바스티유 습격의 와중에 약 100명의 폭동 가담자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수감자들은 풀려났고 바스티유를 지키는 사령관과 그의 부하들은 살해되었습니다.
분노한 민중들은 죽은 사람들의 머리를 높이 쳐들고 시가를 행진했습니다.
바스티유의 습격은 사실상 실패였는데요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은 고작 7명의 일반 죄수였고 노획한 무기도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스티유 습격의 심리적, 정치적 의미는 더할 나위 없이 큰 것이었는데 전제 정치의 상징이 무너진 것이었습니다.
민중은 자신감을 얻었고 이것은 국민이 지배하는 새로운 질서를 향한 중요한 일보가 되었ㅇ며 7월 14일은 프랑스의 국경일이 되었습니다.
혁명의 불꽃은 지방으로도 급속히 확산되면서 농민들이 봉기하여 성과 수도원을 야갈하고 파괴했으며 농민의 의무를 기록한 문서들을 불태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왕위에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루이 16세는 가족들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피신하려했으나 국경근처에서 발각되어 파리로 이송됩니다.
왕은 이제 엄중한 감시 아래 놓이게 되었는데요 이는 서투른 망명 시도가 가져온 정치적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만해도 군주제의 폐지를 진지하게 고려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이제 국왕을 몰아내고 혁명을 계속 진전시켜 공화국을 설립하려는 급진적인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유럽의 군주들은 심각한 우려의 눈길로 이러한 변화를 지켜보았는데 혁명 사상이 확산되어 자기들 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군주들은 루이 16세와의 연대를 선언하고 그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1792년부터 그들은 서로 동맹을 맺고 프랑스 혁명 세력과의 전쟁을 시작했고 프랑스 왕가에 무슨 변이 일어날 경우 파리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굴욕적인 패배를 당할 위험에 직면한 파리는 식량부족, 엄청난 물가 상승까지 겹쳐 다시 소요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주된 책임자로 지목된 국왕이 체포되었고 수천 명이 이르는 혁명의 적들이 살해되었습니다.
1792년 9월 21일 국민 공회라고 불리는 새로운 의회가 구성되어 그 첫 번째 회의에서 공화제가 선포되었습니다.
루이 16세는 국가 반역죄로 기소되어 1793년 1월 21일에 공개 처형되었습니다.
총재 정부도 나라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는 데 실패했고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네덜란드 등 혁명에 적대적인 국가와의 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와중에 나폴레옹 보내파르트라는 젊은 사령관이 많은 승리를 거두면서 대중의 인기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국민들의 생계가 점점 어려워지고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이르자 나폴레옹은 1799년 11월 9일 총재 정부를 무너뜨리고 무력으로 의회를 해산시킨 뒤 스스로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제1통령에 취임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혁명은 끝났다>
혁명이 시작된 뒤 10년 동안 환란의 세월을 겪은 프랑스 국민들은 안정과 질서의 회복을 갈구 하고 있었으므로 따수가 강력한 정권의 출현을 환영했습니다.
이렇게 공화국의 제1통령 나폴레온은 마치 군주처럼 통치할 수 있었고 1802년에는 종신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하지만 야심가이자 입지전적인 출세의 주인공 나폴레옹에게는 그것조차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의 다음 목표는 황제가 되는것이었고 그는 헌법을 개정하고 1804년 12월 2일에 프랑스의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나폴레옹에게는 어떤 좋은 일이나 인간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없다. 그의 끝없는 야망은 오로지 자기 자신과 개인적인 관심에만 집중되어 있다. 그를 보고 경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자신의 행운에 눈이 멀어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절제란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절제할 수 없는 사람은 균형을 잃고 쓰러지게 마련이다.>
루이제의 판단은 정확했고 과도한 야망을 품은 모든 정복자들의 운명이 그러하듯이 나폴레옹에게도 결정적인 패배의 순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운명은 1812년 러시아 원정 때부터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는데요, 이 원정을 위해 60만명으로 이루어진 사상 최강의 군대를 편성했습니다.
누구도 이 전쟁이 나폴레옹의 손쉬운 승리로 끝날 것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예상은 어긋났습니다.
러시아 군대는 나폴레옹 군대와의 격돌을 회피하면서 점점 내륙 깊숙이 후퇴했습니다.
그해 9월 나폴레옹의 대군이 모스크바에 입성했을 때 도시는 거의 텅 비어 있었고 며칠 후 화재가 발생하면서 도시 전체가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학교 제도의 개혁 역시 중앙 집권적으로 추진되었고 전국의 학교 교육은 국가의 통제 아래 단일한 교과 과정과 교과 시간에 따라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독일을 점령한 뒤 이곳에서도 개혁을 단행했는데 예를 들면 교회의 지배 아래 있던 지역이 세속 영주들에게 양도되었습니다.
그렇게 112개의 독일 제국 주교구가 정치 지도상에서 사라지고 350개의 독일 제국 직속 기사단과 제국 직속 도시들도 자치권을 상실하고 지방 제후의 관할이 되었습니다.
제국이 수백 개의 소국들과 잘디잘게 쪼개져 있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고 대신 생존 능력을 갖춘 중간 크기의 국가들이 생겨났습니다.
독일의 상황에서 이것은 커다란 진보였지만 선거에 의해 구성된 의회가 없었기 때문에 시민들은 여전히 정치적 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념이 몰고 온 바람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도 가만히 내벼려 두지 않았습니다.
두 나라 역시 어떻게든 변화를 꾀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슈타인 남작과 하르덴베르크 남작이 개혁을 추진했는데 프랑스를 모델로 삼았습니다.
프랑스 지배에 대한 저항 운동이 일어났는데 나폴레옹의 관심이 전쟁을 위한 돈과 병사를 동원하는데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질수록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특히 독일에서는 나폴레옹과의 투쟁이 민족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옛것을 최대한 그대로 유지하는데 있었고 오스트리아의 총리 메테르니히의 주도 아래 1789년 이전의 체제를 재건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진정으로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 있다고 믿었다면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사회적 불안과 혼란은 계속되었고 경찰국가식 강압을 통해 안정과 질서가 회복되긴 했지만 사람들의 불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불만은 1848년에 또 다른 혁명으로 분출되었는데요 프랑스에서 시작된 혁명은 유럽 전역에 급속도로 퍼져 나갔습니다.
어디서나 사람들은 더 많은 정치적 권리를 요구했고 혁명이 일어난 뒤 몇 달 동안은 군주들이 물러설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을 벌기 위한 몸짓이었을 뿐이고 그들은 전열을 정비해 다시 한 번 무력으로 자기들 이익을 관철시키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파리, 빈, 베를린 등 곳곳에서 혁명 세력은 폭력적으로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군주들이 정치적 변화를 가로막고 지연시키고 있는 상황에서도 경제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해갔습니다.
18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시작된 급격한 경제적 발전은 인간 삶의 전 영역에 걸쳐 큰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흔히 산업혁명이라고 불립니다.
산업 혁명은 농경 문화와 정착 생활이 시작된 이래 인류의 삶을 가장 근본적으로 뒤바꾸었습니다.
원료와 제품을 가능한 한 빨리 저렴한 가격으로 원하는 곳에 보낼 수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증기선과 증기 기관차의 발명은 바로 이러한 운송 문제에 대한 기술자들의 해답이었습니다.
1821년에는 최초의 철도가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에 개통되었고 철도망의 확장으로 인해 산업은 계속 활성화되었습니다.
대량 생산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영국은 세계 최초의 공업국으로 변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발명과 혁신에도 불구하고 산업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노동력이 필수적이었는데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했습니다.
농사를 짓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살아 갈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많은 소농들이 자신의 농지를 팔고 도시로 이주해 머슴처럼 일했습니다.
농촌으로부터의 탈출은 급격한 도시의 성장을 초래했는데요, 1760년에서 1830년 사이에 맨체스터는 인구가 1만 7,000명에서 18만명으로 늘어나면서 최초의 전형적인 공업 도시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도시의 팽창과 함께 많은 새로운 문제가 생겨났는데 실업과 빈곤이 발생하고 노동자와 그의 가족은 위생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극히 단순한 집단 거주 시설에서 갖가지 질병과 전염병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채 살아야 했습니다.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연기를 내뿜는 공장의 굴뚝 때문에 공기가 심하게 오염되었고 수질도 대단히 악화되었습니다.
인간의 노동력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생산 과정을 가능한 한 작은 단위로 나누고 사람들을 각 부분의 전문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스미스는 주장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이 제품의 가격과 제품 생산량을 결정할 것이고 국가는 이 과정에 개입해서는 안된다. 국가의 개입은 여러 경제적 요소들 사이의 자유로운 상호작용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모든 게임 참가자들이 자유로이 자기 능력을 발휘하면서 가능한 한 많은 이익을 얻어 내려고 노력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전반적인 부의 증가로 이어질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애덤 스미스는 개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 사이에 조화로운 관게가 가능하다고 가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의 약자들은 이런 부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고 애덤 스미스의 경제적 자유주의는 누구보다도 공장주와 상인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이론이었습니다.부유한 시민이 이루는 유산 계급, 즉 부르주아 계급이 그 하나고, 임금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이루는 노동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또 다른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두계급은 자연히 서로 투쟁, 즉 전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에는 이미 늦었고 두 계급 간의 격차가 점점 더 커짐에 따라 노동자들의 저항 정신은 점점 더 강화되고 증오심은 심화되며 투쟁은 산발적인 소규모 게릴라전에서 결정적인 전투와 시위로 발전한다. 그리하여 상황은 작은 충격만으로도 대규모의 눈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정도에 이르고 다음과 같은 함성이 온나라에 울려 퍼질 것이다. 궁전에는 전쟁을 오두막에는 평화를! 사태가 이쯤 되면 부자들은 더 이상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게 되리라. 이런 예언으로 엥겔스는 책을 끝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는데요 투쟁은 산발적인 소규모 게릴라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공산당 선언은 당대에 대립하고 있는 두 계급을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로 규정합니다.
부르주아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봉건제를 극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은 100년도 채 되지 않는 지배 기간에 지난 모든 세대보다 더 많은 생산적 업적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노동자는 기계의 부속품으로서 가장 간단하고 단조롭고 쉽게 배울 수 있는 동작만을 수행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물건으로 전락한 인간은 자신의 노동에서 어떤 의미나 만족감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스스로에게 낯선 존재가 됩니다.
상품 생산의 목적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임금을 포함한 생산 비용은 가능한 한 절감되어야 하며 그 필연적 귀결은 프롤레타리아의 궁핍화입니다.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견해와 의도를 숨기기를 거부한다. 공산주의자는 기존의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파괴함으로써만 자신들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지배 계급은 공산주의 혁명을 두려워할지어다. 프롤레타리아는 이 혁명에서 자기를 옥죄고 있는 사슬 외에는 잃을 것이 없다. 반면 그들이 얻을 것은 세상이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이 선언문의 출간과 거의 동시에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고 머지않아 주창자의 이름에 따라 마르크스주의라고 불리게 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은 혁명에서 아직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1848년과 1849년의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시민 혁명이었습니다.
하지만 혁명의 성격은 이후 100년 동안 사회주의적인 방향으로 변화했습니다.
물론 그러한 변화가 꼭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기대했던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미국 남쪽으로는 대부분 스페인의 식민지령이 있었고 브라질만이 포르투갈에 속했습니다.
이들 식민지에서 태어나 성장한 백인 이주민들의 자손들을 크레올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나라의 발전에 이바지했음에도 정치적인 권력에서는 소외된 채 스페인과 포르투갈 관리들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크레올들은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상황에 변화를 가져오려 하면서 독립 투쟁을 하는 집단들이 생겨나는데 처음에는 개별적으로 스페인 군대에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선견지명이 있는 몇몇 지도자들은 이렇게 해서는 싸움에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곧 깨닫고 개별 집단들을 모아서 하나의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남부에서는 호세 데 산 마르틴이, 북부에서는 시몬 볼리바르가 이끈 해방군이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스페인을 물리쳤습니다.
1810년과 1825년 사이에 라틴 아메리카의 모든 국가가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시몬 블리바르는 모든 나라들을 한데 합쳐 미국과 유사한 단일 공화국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들은 독립하여 독자적인 국가를 이루기를 희망했는데 그 결과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페루 등 오늘날의 국가가 탄생했습니다.
이들이 뜻을 같이 한 것은 오직 유럽의 식민 지배 세력에 맞설 때 뿐이었는데 여기에도 미국의 지원이 제공되었습니다.
선거권은 오로지 지주와 상인, 관리 그리고 고위 성직자에게만 있었고 부자들이 더 부유해지고 빈민은 점점 더 무거운 부담을 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상황이 너무나 악화되어 가난한 자들의 반란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폭동이나 혁명은 흔히 군사 독재의 성립이나 개혁의 약속으로 종결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개혁이 시도되더라도 대부분 오래가지 못하고 곧 이전과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처음부터 불안정했고 20세기까지도 계속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이 지역이 엄청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빈곤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국내에서는 소수 백인들만 잘먹고 잘살았고 국외에서는 누구보다도 미국이 많은 덕을 보았습니다.
백인의 국가 미국이 아메리카 대륙의 중부와 남부에서도 백인의 지배를 지지한 것이고 라틴 아메리카는 경제적으로 미국에 종속되어 현제까지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서 두 번째 신대륙 발견이라고 불린 서부 개척 또한 대략 끝이 났고 서부로 진출한 백인 이주민들이 태평양 연안까지 도달했던 것입니다.
이과정에서 백인들은 원주민의 땅과 삶의 터전을 빼앗으며 많은 인디언들이 살해되거나 지정된 원주민 거주지로 쫓겨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예 제도를 거부했고 1852년에 출간된 해리엇 비처 스토우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 집>도 이런 분위기에 일조했습니다.
노예의 삶을 생생하게 그린 이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이 책을 읽은 많은 북부의 주민들은 노예 제도에 대해 진지하게 반성하거나 적극적인 반대자가 되었습니다.
1854년 북부에는 공화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이 탄생하고 노예 제도의 폐지는 이 정당의 중요한 정책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86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당선되자 남부 주들은 북부 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하고 남부 정부인 아메리카 연합국을 설립했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이 연합국의 설립이 법적으로 무효임을 선언했고 이를 둘러싸고 남부와 북부 사이의 분쟁이 점점 격해지다가 1861년 내전이 발발하기에 이릅니다.
대부분 자원병으로 구성된 남부군은 전쟁 초기에 상당한 전과를 올렸지만 엄청난 전력을 소모한 4년간의 전쟁 끝에 수적, 경제적, 기술적 측면에서 모두 우세한 북부군에게 항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링컨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위대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남북 연합을 수호하는 것 이상의 목표를 위해 싸웠습니다. 우리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것을 막고자 싸웠던 것입니다.
19세기 중반까지 공식적인 인도의 지배자는 토후들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영국이 인도 전역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인도를 근대화하려 했는데요 영국인들이 생각한 근대화란, 곧 서구화로서 이 과정에서 인도인의 고유한 생활방식과 문화는 거의 무시되었습니다.
1857년 영국 장교들에게 불만을 품은 인도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은 빠른속도로 확산되어 영국 지배에 반대하는 봉기로 까지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친영 인도 군대의 도움으로 폭동 진압에 성공했고 그 후 영국은 인도의 공식적인 통치권을 이양받고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의 여제라는 칭호가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정책에 있어서는 이전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고 다른 식민지들처럼 원료 공급지이자 영국 제품의 판매 시장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인도에 생산성 있는 산업 시설을 건설하고 주민들의 생활조건을 개선하는 것은 영국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아편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1839년에서 1842년까지 그리고 1856년에서 1860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벌어졌습니다.
영국군은 프랑스군과 공동으로 베이징까지 진격해 황제의 궁궐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습니다.
중국은 일부 지역을 영국과 프랑스에 할양하고 항구를 개방해야 했고 중국 경제는 거의 유럽의 정부와 기업의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심지어 중국을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나누어 가지려는 계획까지 세워졌는데 실현되지 않은 것은 세 나라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오랫동안 외부 세계와 담을 쌓고 지냈는데 19세기 초까지도 서구 상인들이 일본에 발을 붙이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립 정책은 1853년 7월 8일로 끝이나는데 이날 미국의 포함 4척이 에도의 항구에 도착합니다.
함대 사령관 패리 제독은 미국 대통령이 보내는 선물을 가지고 와서 무역을 위한 조약을 체결하자고 요구했습니다.
일본 왕은 이를 거부하고 미국인들을 추방했지만 8달 후에 패리는 다시 열 척의 전함을 이끌고 와서 조약 체결을 강요했고 일본은 결국 이에 굴복했습니다.
태평양의 나머지 섬들은 네덜란드와 프랑스, 포르투갈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이렇게 아메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가 열강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후에 남은 사냥감은 아프리카뿐이었습니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는 수백 년 동안 수익성 높은 노예 매매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되었는지는 짐작하기로 약 3천만명이 팔려갔을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엄청난 인적 손실이 가져온 피해는 참으로 심각한데요 많은 지역에서 전통적인 부족 사회의 구조가 파괴되었고 이에따라 사람들은 삶의 토대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인 아프리카 쟁탈전은 1869년 수에즈 운하의 개통과 함께 시작되어 19세기 말에 이르면 아프리카 대륙의 거의 전부가 유럽 열강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고 독일이 식민 열강의 대열에 합류한 것은 1871년에 통일 제국을 이룬 후의 일이었습니다.
19세기 초에 등장한 독일 민족 국가의 이념은 반세기도 훨씬 더 지나서야 현실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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