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영사 재판권 취득]
1784년 미국 상선이 최초로 중국에 도착한 이후, 1844년 중미 간 왕샤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60년간 곽량 사건 혹은 테라노바 사건은 유일하게 치외 법권에 관련된 사건이었습니다.
중국 측은 현장 조사, 증거 수집, 혐의자 색출에서 심리와 집행까지 완전하게 사법 주권을 행사했고 중국 법률에 의해 외국 국적 선원을 처벌했습니다.
미국 측은 광둥성 당국이 공개한 조정 보고서를 보았으므로, 양국 간에 숨겨진 내용 없이 투명하게 처리되었습니다.
미국 측은 중국 측 관리들의 권한 행사나 중국 사법에 공감을 표하지는 않았지만, 광저우 영사와 선원 모두 신중하게 중국 법을 준수했으며 사법 과정에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사건 이후로도 중미 무역은 계속 발전하여 미국도 이 문제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테라노바 사건 이듬해인 1822년 당시 대통령이던 제임스 먼로와 국무장관 존 퀸시 애덤스가 도광제, 량광 총독에게 서신을 보냈으나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더 이상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광저우에 정식 영사를 파견하는 것을 포함해,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미국은 먼로주의 정책으로 아메리카 일에 바빠서 동아시아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당시 미국의 동아시아 외교에 대해 정책이 없는 것이 정책이라고 비평했습니다.
오히려 영국이 관심을 보였는데, 이 사건이 영국의 중국 내 치외 법권과 연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821년 12월 15일, 사건 후 한달 여가 지난 뒤 영국 군함 토파즈호가 주장강 입구 링딩양에 닻을 내렸습니다.
비무장한 병사들이 식수를 구하기 위해 링딩섬에 상륙했습니다.
그러나 창과 곤봉으로 무장한 현지 주민들에게 구타당하자, 영국군은 무장소대를 보내 이들을 데려갔습니다.
이 사태로 영국군 14명이 다쳤고, 중국 주민 2명이 죽었으며 4명이 부상당했습니다.
토파즈호 선장 리처드슨은 완 총독에게 서신을 보내 폭력을 행사한 주민의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한편 총독은 부상 선원들을 중국 측에 넘겨 조사에 응하라고 요구했는데, 양측 모두 서로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리처드슨 선장은 중국 관리 1명이 배에 올라 조사하는 것 외에 영국왕의 배에서 정식 조사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미국 에밀리호가 판위 지현의 공개 심리를 받아들인 것과는 달랐습니다.
선장은 군인 2명에 대한 심리와 사망한 중국인에 대해 배상하라는 완 총독의 요구를 모두 거절했습니다.
대신 상해를 입힌 군인을 영국 법으로 처벌하겠다고 했지만, 완 총독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중국 측은 영국 상인 대표와 임시로 구성된 영국 측 위원회에서 책임을 지도록 하고 1월 11일 영국과 무역을 중지시켰습니다.
완 총독은 영국 상인 대표가 영국 군함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영국과 협의를 통해 중국 관리를 배에 파견하는 비공식 교류를 진행했습니다.
2월 23일 마침내 무역이 재개되었고 사건은 흐지부지되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전 세계에서 식민지를 개척하는 중이었습니다.
중미, 중영 간 살인, 상해 사건을 계기로 중국에서의 치외 법권 문제가 중요해졌습니다.
영국 왕립 해군은 중국 관리들이 배에 올라 정식으로 조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광저우 당국과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미국 상선들은 교섭 과정에서 치외 법권 문제로 중국 측과 마찰을 빚지 않았습니다.
중국이 미국 선박, 성조기 아래서 법정을 열고 미국 영사도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지만, 미국 법으로 처리하겠다는 요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영국인들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양국 정부의 대아시아 정책의 차이에서 왔습니다.
그러나 이후 두 나라의 정책은 점차 같은 방향을 향하게 됩니다.
1826년 6월 영국은 1차 영국 - 미얀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이어 영국 동인도 회사 대표 헨리 버니가 주변국인 시암(태국)의 국왕 라마 3세와 버니 조약을 맺어 동맹 관계를 형성하고 식민지의 경계를 명확하게 합니다.
이 조약 2조는 다음과 같이 명시합니다.
영국령의 어떤 지역이나 국가가 시암인을 공격하면 시암인은 직접 대응하는 대신 먼저 영국에 사유를 통보해야 한다. 영국이 조사하여 영국인에게 잘못이 있으면 영국법에 의거 처벌한다. 시암령의 어떤 지역이나 국가가 영국인을 공격하면 영국은 직접 대응하는 대신 먼저 시암에 사유를 사유를 통보해야 한다. 시암이 조사하여 시암인에게 잘못이 있으면 시암법에 의거 처벌한다.
표면적으로 동등한 것처럼 보이는 이 조항에서 중요한 것은 시암에서 영국의 치외 법권을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시암으로서는 그럴만했습니다
영국군이 미얀마를 공격할 때 시암 국왕 라마 3세는 함대와 코끼리 부대를 파견하여 협조했습니다.
버니는 영국을 동맹으로 생각하여 버니 조약 체결 시 과다한 요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국 식민지 관리들은 버니 조약이 시암에게 너무 많은 권리를 주어 아시아 여러 식민지에서 영국이 큰 손실을 보았다고불만을 토로했습니다.
1833년 3월 미국은 시암국에 에드먼드 로버츠를 파견하여 라마 3세와 최초로 시암 국왕 - 아메리카 합중국 우호 통상 조약 10조를 맺었습니다.
이 조약 9조는 시암에 온 미국 상인들은 반드시 시암의 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영국과 달리 미국은 시암에서 치외 법권을 얻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834년 영국이 테라노바 사건을 다시 끄집어냈습니다.
런던의 잡지 쿼털리리뷰는 미국이 중국 법을 침해하자 중국이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서 범법자를 잡았다고 전했습니다.
잡지는 테라노바 사건을 언급하며 미국이 이 불쌍한 이탈리아인을 희생양 삼아 다른 미국인 범인의 목숨을 구했다며 비난했습니다.
미국은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1835년 1월 미국의 잡지 노스 아메리칸 리뷰는 미국이 자국 선원을 보호 하려고 테라노바를 희생양 삼지 않았으며 쿼털리 리뷰의 주장은 사실이 아닌 허구라고 반박했습니다.
또한 1834년 1월 차이니스 리포지터리의 보도를 인용하여 사건 경과를 설명하고 미국은 자국민이라고 해서 범법자를 비호하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 독자들은 중국 법이 메디아나 페르시아 법처럼 사람을 죽이면 역시 목숨으로 배상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중국 법에 대해 더 많은 지면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추앙하는 국제법에서는 외국인이 그 나라 관할지에 들어오면 반드시 그 나라의 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5년 후 영국은 아편 전쟁을 일으키고, 1843년 오구통상 조약(5개의 항구를 개방)을 맺어 영사 재판권을 얻어냈습니다.
영국인이 중국에서 범죄를 일으키면 영국 관리가 영국 법에 의해 처벌한다는 것으로, 치외 법권을 실현했으나 중국으로서는 사법권이 심각하게 침해당했습니다.
1844년 7월 미국 대표 칼렙 쿠싱은 량광 총독 기영과 아오먼 왕샤에서 아메리카 합중국 - 중화 제국 평화우호통상조약을 맺었습니다.
21항에서 중국인과 합중국인 사이에 소송이 발생하면 중국인은 중국 지방관이 중국 법에 의해, 합중국인은 영사관에서 본국법에 의해 처벌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이 영사 재판권으로 인해 미국 국민도 중국에서 치외 법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 규정을 지시하지 않았으나 쿠싱 본인이 정치적 야심으로 담판 지어 얻은 성과였습니다.
쿠싱은 기독교 국가들은 공동 원칙인 국제법을 지키지만 대부분 이슬람교 국가, 이교도 국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아 실제로는 국제법이 기독교 국가들만의 법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또 중국이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교도 국가이므로 터키 등 이슬람 국가처럼 자기 법률로 기독교 국가 국민을 처벌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종교적 신념으로 국가와 법을 논하는 쿠싱의 궤변은 많은 사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치외 법권 인정은 중국에게는 치욕이었고 훗날 매우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쿠싱이 아니었어도, 아편 전쟁 이후 미국이 다른 서구 국가들처럼 중국에서 치외 법권을 얻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였습니다.
결국 미국은 이때부터 1943년 5월 중국에서 미국 치외 법권 처리의 취소에 관한 문제 조약이 발효되어 폐지 될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치외 법권을 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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