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제재와 테라노바의 죽음]
다음 날 중국 측은 미국 선박에 엄격한 무역제재를 내렸습니다.
월해관 감독관 아이방아는 항구에 있는 모든 미국 선박을 봉쇄했습니다.
무역은 중지되고 에밀리호는 발이 묶였습니다.
이는 중국 측이 외국 상인에게 취할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조치였지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고육책이기도 했습니다.
미국 측은 여전히 중국 측과 심리에 대해 나름의 논리를 펼치며 버텼지만 3주일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손해는 막심했고 이러다가 투자자들이 본전도 못 건질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배를 수색당해 아편이라도 발각되는 날엔 살인 사건을 넘어 문제가 커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습니다.
10월 24일 중국 병사들은 에밀리호에서 테라노바를 압송하여 광저우성에 있는 한 무역상 건물에 구금하고 면회를 금지시켰습니다.
다음 날 테라노바에 대한 심리는 외국인 참석자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광저우현지현 종영, 난하이현 지현 길안, 판위현 지현 왕운임 등은 진려, 곽아두 등 증인들을 소환했습니다.
량광 총독 완원은 도광제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테라노바가 혐의를 부인하다가 진려가 영어로 질책하자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앞선 진술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기술했습니다.
두 손으로 항아리를 잡고 위에서 던지는 자세를 취하며 통역을 부탁했다고도 했습니다.
사법 관리인 안찰사와 관리 등은 모두 자백이 명확하니 교수형에 처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10월 28일 이른 아침, 종영, 길안, 왕운임 등의 참관하에 테라노바의 교수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시신은 에밀리호로 보내져 선상에서 장례식이 진행되었습니다.
다음 날 중국 측은 무역을 허가했습니다.
이로써 에밀리호가 겪었던 모든 사법적, 상업적 악몽은 끝났습니다.
곽량, 테라노바가 죽었지만 성조기는 여전히 주장강과 하물 창고 창공에서 휘날렸습니다.
십상행 상인과 통역사들은 다시 양측을 바삐 오가며 새로운 거래를 진행시켰습니다.
양국은 사회 사법 제도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었지만 적어도 사업에서는 서로 좋은 파트너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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