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판결 vs 미국 측의 결정]
9월 28일 코플랜드 선장은 미국 상인 5명, 화물 관리인 5명을 포함한 위원회를 구성하여 사건 처리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와일리는 영사라는 신분이 위원회에 부담을 줄 것을 우려하여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논의 끝에 중국 관리가 주재하는 공개 심리를 통해 모든 증거를 살펴보자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는 치외 법권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의미였습니다.
미국 측은 1807년 영국 국적 선원 에드워드 신 사건 때 영국 관리들이 참관한 전례를 들어 심리 현장 참가를 요구했습니다.
이전 1807년 술취한 영국 선원이 중국인 1명을 때려 사망케 한 사건입니다. 결국 에드워드 신을 중국에 인도하고 범인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유가족에게 백은 12냥을 배상한 사건입니다.
와일리는 십상행 상인을 통해 이 내용을 중국 관리에게 전했습니다.
공개 심리는 에밀리호 선상에서 열렸습니다.
와일리는 영국인 목사 모리슨에게 통역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런던 선교사회 소속으로 1807년 중국에 파견된 선교사였습니다.
1815년 아오먼에서 중국어 사전인 중영자전을 편찬하는 등 한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습니다.
미국 측에는 중국어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거래할 때는 오병감 등 상인이나 광저우의 통역사를 대동했으나 이들의 영어 실력이 형편없어서 재판 같이 중요한 일은 모리슨 같은 사람에 맡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 관리들은 모리슨이 영국인이므로 중미 양국 간 사건에 관여할 수 없으며, 중국 관리 외에 누구도 법정에 낮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와일리도 참여를 거부했습니다.
이렇게 미국측 위원회의 요구는 거부되었지만 공개 심리만큼은 받아들여져서 10월 6일 마침내 심리가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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