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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외교

곽량의 죽음에 범인은 누구였을까? 재판진행은?

by KS지식 - 문화 YouTube 2022.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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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누구?]

 

사건 발생 3일 후 남편 곽소제는 판위현 아문에 고발장을 제출했습니다.

에밀리호 사건은 광저우 주재 미국 영사 벤저민 와일리에게도 보고되었습니다.

영사는 더 이상 사건이 확대되지 않도록 십상행 오병감에게 중재를 부탁하는 한편, 먼저 선박 회사가 피해자에게 합의금으로 1만 5,000달러를 지불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이틀 뒤 윌리엄 코플랜드 선장은 영사를 방문해서 중국 측 일처리에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또한 테라노바는 죄가 없으니 공개 수사로 결백을 밝혀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로써 영사가 회사와 사망자 가족 간 진행하려던 중재안은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당시 중국과 미국 사이에는 어떤 외교 조약도 없었습니다.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기에 와일리는 비공식 외교관을 ㅗ활동했습니다.

행정, 사법적 권한이 없고 경비도 미국 정부가 아닌 상인들이 낸 회비에서 받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상인회 회장도 비슷한 지위였습니다.

중국은 그를 대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도 역시 암암리에 아편 장사로 돈을 벌고 있었기 떄문입니다.

원래 대반은 광저우의 외국 상인들과 십상행이 자금을 운용했던 영국 상인 윌리엄 자딘을 부르던 말로, 오늘날 CEO 혹은 지점장 등에 해당하는 호칭이었습니다.

자딘은 중국 무역을 하면서 한편으로 사법적 분규도 처리했습니다.

어쨌든 와일리에게는 에밀리호 사건을 처리할 실질적 권한이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에밀리호 선장이 직접 나선 것입니다.

사건이 발생한 판위현의 지현 왕운임은 황푸 부두에 나가 와일리, 에밀리호 선장, 미국 상인 그리핀 스티스와 함께 현장을 둘러보고 시신을 살폈습니다.

왕 지현의 검시 결과 곽량의 머리 오른쪽에 길이 약 4.25센티미터, 넓이 약 9밀리미터 크기의 상처가 머리뼈 깊은 곳까지 나 있었습니다.

흉기는 항아리였고 상처의 형태가 갈모 파손부분과 일치했습니다.

목격자들은 그 항아리가 에밀리호에서 던져진 것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시신은 물에 빠진지 하루가 지나 많이 부풀어 있었으나, 와일리는 머리 상처가 물에 빠지기 전에 입은 것이라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왕지현은 곽량이 테라노바가 던진 항아리에 맞고 물에 빠져 사망한 것이 분명하다고 결론딧고 선장에게 범인 인도를 요구했습니다.

와일리 영사는 자체적으로 조사한 후에 결정하겠다고 답했습니다.

며칠 동안 중미 양측은 각자 증거를 찾는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왕지현, 와일리 영사, 에밀리호 선장 등이 바삐 움직였습니다.

에밀리호의 보증을 섰던 십상행 상인 여광원과 오병감이 통역과 중재를 담당했습니다.

쌍방은 피의자, 목격자, 증거 등에 관해 각자 다른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에밀리호의 윌리엄 코플랜드 선장은 사건이 발생하자 신속하게 당사자인 테라노바를 포함한 선원들의 결백을 주장하는 12장의 진술서를 제시했습니다.

테라노바의 증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 프랜시스 테라로바는 선서하고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1821년 9월 23일, 일요일 오후 대략 1시 30분 전후 나는 미국 선박 에밀리호 위에서 중국 여성이 과일을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작은 배를 타고 우리 배에 다가왔는데 나는 과일을 사려고 1전을 항아리에 넣어 전해주었고 항아리를 받은 그녀는 과일을 그 안에 넣었다. 그녀가 항아리를 건네려 했으나 배가 작아서 우리 배를 쫓아오지 못했다. 나는 그냥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과일을 받으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사이 그녀의 배는 파도에 휩쓸렸다. 나는 그녀에게 해를 입히지 않았으며 그럴 의도도 전혀 없었다.

 

테라노바는 글을 쓸 줄 몰라서 다른 선원이 진술서를 대필했습니다. 

이 진술서 외에 선장은 선원 20여 명이 서명한 탄원서를 첨부했습니다.

곽량이 배에서 떨어지기 전에 에밀리호에서 어떤 상해도 입히지 않았으며 스스로 조심하지 않아 물에 빠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곽량의 배에서 발견된 항아리가 테라노바와 관련 있다는 것이 증명됐지만, 테라노바는 곽량과 어떤 마찰도 없었으며 항아리를 던지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미국 영사 와일리는 목격자와 사건 당사자들을 면담하여 13건의 진술서를 받았습니다.

에밀리호에서 제출한 선원들의 진술과 마찬가지로 테라노바의 결백을 뒷받침하는 내용이었습니다.

3명의 증인은 중국 여성이 에밀리호에 접근하다가 물속으로 빠지는 것을 보았지만 선박에서 물체가 떨어지는 것은 보지 못했으니 이는 불행한 사건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진술이 다 일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근에 있던 알렉산더호의 윌리엄 로슨은 에밀리호에서 누군가 작은 배의 여자에게 항아리를 던졌으며, 그것에 머리를 맞고 물에 빠지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영국 선박 헬렌호의 토머스 크레스웰은 에밀리호에서 한 사람이 항아리를 들어 바다 쪽으로 던지려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 두 진술은 다른 각도에서 본 것으로 테라노바에게 매우 불리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두 선원은 에밀리호 선원과 중국인 여성 사이에 적대적인 행위는 없었다며 애초의 진술을 뒤집었습니다.

왕지현은 현장을 조사한 뒤 내심 테라노바가 던진 항아리에 중국 여성이 사망했다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사건 현장 주변에 있던 진려와 곽량의 딸도 곽량이 항아리에 머리를 맞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미국 측은 곽량의 남편도 증인에 포함시켰는데 사건 당시에는 현장에 없었습니다.

중국 관리들은 남편의 진술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해서 아내의 사체를 건져 올렸으며 몸의 상처를 발견했습니다.

파손된 갈모와 배 위에 있던 항아리 손잡이를 찾아낸 것도 곽량의 남편이었습니다.

와일리 영사는 테라노바의 결백을 주장하는 30장의 진술서를 량광 총독 완원과 왕지현에게 전달했습니다.

중국 관리들은 와일리가 사건을 모호하게 처리하면서 선원을 비호한다며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완원이 와일리에게 범인은 중국 법에 의해 광저우에서 교수형에 처할 것이라고 통보하자 미국 측은 바짝 긴장했습니다.

완원은 장쑤성 이정 사람으로 후광 총독, 윈구이 총독을 역임한 대학사로 과거 출신 고위 관료였습니다.

그의 통보는 사태의 심각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청나라 법전인 대청율례중 외국인 관련 조항인 화외인유범 부분은 외국인 범죄자는 법에 의해 처단한다고 규정합니다.

즉 외국인이 중국 영토안에서 죄를 저지르면 중국 법으로 판결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형법 인명항에서는 싸움 중 살인한 자는 흉기와 관계없이 교수형에, 고의로 살인한 자는 참수형에 처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광저우는 유일한 개항 항구로 선원들의 매춘, 음주 등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중국인과의 다툼,구타 사건도 많아서 사법 당국이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량광 총독 책릉이 외국인에게 교수형이 내려졌을 때 관할 지현이 피고인인 외국인의 상관과 같이 이를 심리하고 상주하면서 형을 집행하는 내용으로 건륭제의 제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1743년의 일이었습니다.

원래 민간에서 사망 사건이 발생하면 지방관 - 관할 서의 독무 - 중앙 형부까지 3단계 심리를 거쳐 최후에 황제가 제가하면 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러나 1743년 이후 외국인은 광저우 지방관인 지현과 총독의 재심을 거쳐 현지에서 형을 집행했습니다.

베이징 형부나 황제의 지시가 없어도 처벌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제가를 받고 3년 뒤 량광 총독은 광저우 구시가지에서 신시가지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1746년 이후 광저우성 주변에 지방관인 지현부터 총독까지 관리들이 한곳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공문이 오가는 시간이 단축되고 사형 재심 건도 신속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현지에서 처리한다고 해도 오늘날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처럼 체포하는 즉시 사형시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현지에서 형을 집행하고 후에 조정에 보고하는 사례가 부쩍 늘어난 것은 1853년 이후였습니다.

당시 태평천국의 난으로 지방의 사태가 긴박해지자 조정은 현지 관리에게 결정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난이 진압된 이후로는 지방의 사형 집행 역시 재심을 거쳐야 하는 신중한 일이었습니다.

현지에서 외국인을 교수형에 처한 사례를 보면, 1784년 중국황후호가 최초로 광저우에 도착했을 때 영국 선박 레이디 휴스호의 선우너이 환영의 의미로 예포를 쏘았는데 부근의 다른 중국 선박 선원 2명이 여기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중국 관리들은 선원의 인도를 요구했습니다.

영국은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중국이 무역을 금지시키자 이에 응했습니다.

중국 관리들은 조사 후 죄가 확정되자 광저우에서 교수형을 집행했습니다.

광둥성 당국은 외국과 관련된 중국인 범법자 역시 엄중하게 처벌했습니다.

1817년 5월 26일 미국 볼티모어에서 온 미국 선박 와바시호가 아오먼에서 아편 거래를 하다가 중국 해적들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해적들은 1등 항해사와 선원을 살해하고 은화, 아편 35상자, 기타 물품을 약탈했습니다.

도망가던 선원 2명이 익사했고 2등 항해사는 중상을 입고 이틀 후 사망했습니다.

와일리 영사는 범인들을 신속하게 엄벌에 처하라고 요구했지만 자국 선박이 아편을 뺏겼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한 달이 안 되어 당국은 해적들을 체포하고 아편 일부를 회수했습니다.

일주일의 조사를 거쳐 그해 6월 13일, 많은 외국인이 보는 가운데에서 5명의 주범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종범들은 4,000리나 떨어진 곳으로 유배 보내졌습니다.

사건 처리 과정에서 중국 관리들이 아편을 회수하자 미국 상인들은 급히 사건을 마무리 지으면서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중국 사법 당국의 공정한 일 처리와 형장에서 머리가 땅에 떨어지는 참혹한 광경은 미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기억 때문에, 1821년 에밀리호 선주와 선장은 자신의 선원이 광저우의 교수대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습니다.

게다가 터키에서 실어 온 아편이 적발되면서 상황은 더욱 난처해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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