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투리시간에 공부하는 한국사] - 8. 고려 무신정권
신라 사회에 불만을 품고 개혁을 주도했던 호족과 6두품들은 고려를 건국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특권층을 형성하는데 이들을 문벌이라고 부릅니다.
문벌 세력의 경우 5품 이상 관리는 음서제를 통해 시험을 보지 않고 관리가 되었고 공음전을 통해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경제적 특권을 누렸습니다.
문벌 세력은 왕실의 외척이 되거나 다른 문벌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어 권력이 분산되는 것을 방지하였습니다.
심지어 친척끼리 사돈을 맺거나 근친혼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권력이 계속해서 집중되면서 많은 문제와 모순이 쌓이는데요, 문벌 중심의 고려사회가 흔들리기 시작한 첫 번째 사건이 이자겸의 난입니다.
이자겸은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었습니다.
이자겸의 딸은 예종(인종의 아버지)과 결혼하고 또 다른 딸은 인종과 결혼을 하여 인종은 이모랑 결혼을 하게 된 셈입니다.
이렇게 이자겸은 왕실과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으며 권력을 독점하다가 스스로가 왕이 되고자 난을 일으킨 것이 이자겸의 난입니다.
이렇게 하나둘씩 문벌 세력의 권력독점과 부패가 계속 되는 가운데, 무신에게 군인전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업신여기는 일이 발생합니다.
무신 중에 존경을 받던 정중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무신의 수염은 타지 않는다며 정중부의 수염에 불을 붙여 수모를 줍니다.
그리고 한뢰라는 문신은 연로한 이소응이라는 무신에게 무술 대련을 신청하여 대련에서 이기고 나서 조롱하며 고령의 무신 이소응의 뺨을 때립니다.
결국 무신은 차별, 수모, 경제적 궁핍을 참지 못하고 문신을 제거하는데 이가 바로 고려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기점인 무신 정변입니다.(1170)
이후로 무신 정권이 시작되는데 정변에 성공후 무신끼리 치열한 권력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무신정권의 중심이 여러 차례 바뀝니다.
무신정권은 삼별초와 도방이라는 군사 기구도 설치합니다.
도방은 자신들의 신변 보호를 위한 사병집단이었고 삼별초는 최우가 치안유지를 위해 조직한 좌별초와 우별초에 신의군을 합쳐 조직한 군대입니다.
도방과 삼별초는 무신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 됩니다.
무신들은 차별에 저항해 정변을 일으켰지만 사회를 개혁하지 않고 오히려 백성들을 수탈했습니다.
이에 백성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지고 무신정권에 저항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공주 명학소에서 일어난 망이, 망소이의 난(1174)이 있습니다.
고려 특수 행정구역으로 향, 부곡, 소가 있는데 거기에 거주하는 백성은 양인이지만 거주지를 옮길 수 없고 일반 백성보다 많은 세금을 내는 등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소의 주민들이 들고난 일입니다.
또다른 사건으로는 만적의 난(1198)이 있습니다.
만적은 개경에 살던 사노비였는데 노비들을 모아놓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신의 난 이후 관직에 오른 사람들 중 천민 출신도 많다. 장군과 재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노비들은 만적의 주장에 찬성하고 노비 문서를 모두 불태운 뒤에 집권하자는 계획이었는데 순정이라는 노비가 자신의 주인인 한충유에게 고발을 하고 한충유는 무신 최충헌에게 이 사실을 보고 하여 만적과 함께 참여한 수백명의 노비는 처형됩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무신 정권 시기에 몽골이 쳐들어옵니다.
최우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항전을 하지만 결국 항복하고 개경환도(1270)하게 되면서 무신정권 100년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원 간섭기가 시작되는데 원나라는 철령 이북지역에는 쌍성총관부, 제주에 탐라총관부,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여 고려 영토 일부를 직접 통치합니다.
후에 원은 1290년 고려에 동녕부를 반환하지만 쌍성총관부는 공민왕이 1356년에 무력 수복합니다.
그리고 개경에 정동행성을 설치하는데 이는 동쪽을 정벌하러가기 위해 만들어진 군사 기구였습니다.
원 간섭기 시기에 고려 한줄기의 빛 공민왕이 등장하여 친원세력에 철퇴를 가합니다.
공민왕은 친원세력 숙청하고 무력으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탈환하여 고려의 영토는 다시 철령 이북으로 확대됩니다.
왕실 호칭과 관제를 복구하고 원의 풍습도 금지 시키고 원의 내정 간섭 핵심 기구였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혁파합니다.
권문세족이 장악하던 인사기구 정방도 폐지합니다.
그리고 전민병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이 부당하게 빼앗은 양민의 토지를 돌려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공민왕의 전민변정도감과 고려전기 광종의 노비안검법은 목표가 유사합니다. 왕권을 강화하면서 국가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공민왕의 개혁은 친원파 권문세족을 완벽하게 제압할 만큼 크지 않았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채 고려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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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iXmy7qccU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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