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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투리시간에 공부하는 한국사] - 7. 후삼국통일 N 고려탄생

by KS지식 - 문화 YouTube 2022.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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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투리시간에 공부하는 한국사] - 7. 후삼국통일 N 고려탄생

신라 말 귀족들의 왕위 다툼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때 지방 호족이었던 견훤은 후백제를,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워 후삼국 시대가 열립니다.
왕건은 궁예의 부하였는데 궁예가 미륵불을 자처하며 폭압적 정치를 지속하자 부하들은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게 됩니다. (918)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고려 왕건에 도움을 요청했고 왕건은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패했지만 신라인들은 호감을 가지게 됩니다.이후 견훤은 고창(안동)전투에서 고려에게 패하고 아들에게 갇히게 되는 수모를 겪으며, 결국 왕건에게 투항합니다. 신라의 경순왕도 고려에 자진 흡수되기로 결정합니다.
이렇게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합니다. (936)

건국초기에는 호족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호족과 관련된 통합정책과 견제 정책을 동시에 펼쳤습니다.
대표적인 통합정책으로 혼인정책, 사성정책, 역분전 배분이 있었는데요,
혼인 정책으로 전국의 유력 호족들의 딸과 정략 결혼을 함으로써 호족을 단단히 묶어 두었습니다.
그 결과 왕건은 부인이 29명이고, 자녀 중 아들만 해도 25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씨 성을 내리는 사성 정책도 펼쳤으며, 건국과정에서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역분전을 배분했습니다.
호족에 대한 견제정책으로는 사심관 제도와 기인 제도가 있었습니다.
사심관 제도는 지방 세력을 사심관으로 임명하고 그 지역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사심관이 그 책임을 지게 하는 것입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 되었습니다.
기인 제도는 인질 제도인데요, 통일 신라의 상수리 제도를 모방한 제도입니다.
상수리 제도가 본인을 인질로 삼았다면 기인 제도는 대상이 그 아들이었습니다.
이후 태조(왕건)는 고구려 땅을 회복하고자 한 북진 정책, 민생안정을 위한 세금인하,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곡식을 빌려주는 흑창설치를 했습니다.
태조 뒤를 이은 혜종, 정종은 왕위에 오른지 얼마 안되어 죽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광종이 고려의 4대왕으로 즉위합니다.
왕권 강화정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광종은 7년동안 왕권 강화 정책은 실시하지 않고 정치학책 <정관정요>만 읽었다고 합니다.
이에 호족들은 광종을 경계하지 않았고, 이후 국고가 바닥날 때쯤, 광종은 호족에게 노비안검법을 조심스럽게 제안합니다.
7년간 광종을 만만히 생각한 호족은 이 제도를 받아들입니다.노비안검법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양민으로 되돌리는 정책으로 세금을 내는 양민 수를 늘릴 수 있어 국고를 튼튼히 할 수 있었고, 유사시 군사력으로 전환될 수 있는 노비를 줄여 호족세력의 약화를 가져옵니다.
쌍기의 건의를 수용해 과거제를 시행하고 연이어 공복을 제정합니다.
이 두가지 정책은 왕이 실력에 따라 직접 관리를 뽑고, 색이 다른 옷을 입혀 서열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이는 왕에게 충성할 그리고 실력 있는 자들을 등용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호족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이 때 광종은 역모라는 명분을 앞세워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합니다.
이렇게 피의 숙청이 끝나고 왕권을 확립한 광종은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준풍이란 연호를 발표합니다.
이후 경종이 5대왕으로 즉위하고 처음으로 직역에 따라 전지와 시지를 지급하는 제도인 전시과 제도를 시행합니다.(시정 전시과)
이렇게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고려는 안정기로 진입합니다.
광종의 아들이었던 경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사촌 동생인 성종이 왕위에 오릅니다.
성종은 즉위 후 곧바로 유교 사회 건설을 위한 작업에 착수하여 정치 이념으로 유교를 장착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스템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5품 이상의 중앙 관리들에게 고려의 시정을 논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였고, 이 때 최승로가 고려의 당면 과제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적은 시무 28조를 올립니다.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채택하여 국가 시스템을 정비합니다.
호족 세력은 향리층으로 변화하며 중앙 정치 체제로 편입되고 지방의 행정 실무를 맡게 됩니다.
조선 시대의 향리와는 다르게 고려 상급 향리의 경우 지방 행정을 장악하고 군대까지 통솔하는 지방의 실세였습니다.
군사 제도를 살펴보면, 중앙군은 2군 6위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2군은 국왕의 친위 부대이며 6위는 수도 경비와 국경 방어를 담당하였고, 직업 군인으로 군적에 올라 군인전을 지급 받았습니다.
지방군은 양계를 지키는 군대와 5도를 지키는 군대로 구분됩니다.
5도에는 주현군이 주둔했고, 양계에는 주진군이 주둔했습니다.
주현군과 주진군은 군적에 오르지 않고 군인전도 지급받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성종 때 중앙과 지방의 시스템이 정리되며 고려는 안정기로 접어들며 고려 초기 지배층을 이룬 6두품과 호족 출신들이 문벌이라는 특권층으로 자리잡게 되며 고려초기의 역동성을 잃고 모순이 점점 드러나게 됩니다.

제 글이 여러분께 도움이 되었다면 아래 영상도 클릭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상에 더 자세한 내용이 있고 좋아요는 더 좋습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edczjWAHm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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