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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투리시간에 공부하는 한국사] - 41. 대한민국 현대사(이승만 - 6.25 - 박근혜 까지 한방에 정리)

by KS지식 - 문화 YouTube 2022.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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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투리시간에 공부하는 한국사] - 41. 대한민국 현대사(이승만 - 6.25 - 박근혜 까지 한방에 정리)

194851038도선 이남지역에서 총선거가 실시됩니다.

비록 남한에서만 치러진 총선이지만 510 총선거의 의미는 매우 큽니다.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 원칙에 따라 치러진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주의 선거였습니다.

총선거는 국회의원을 투표로 뽑는 것으로 나라를 출발시키려면 우선 법이 있어야 하니까 입법 기관인 국회를 먼저 구성하는 것입니다.

510 총선거로 2년 임기의 국회 의원이 선출되고 이렇게 구성된 국회가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정합니다.

그리고 헌법을 제정합니다. 헌법을 만든 국회라 하여 초대국회를 제헌 국회라 합니다.

제헌 국회가 제정한 헌법을 제헌 헌법이라고 합니다.

제헌 헌법은 삼권 분립과 대통령제를 원칙으로 하고 대통령 선거는 간선제 방식을 택했습니다.

당시 간선제는 국민이 뽑은 국회 의원들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현재는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직선제 방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되고, 드디어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선포됩니다.

김구, 김규식 등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510 총선거에 입후보하지 않아 이승만의지지 세력이 대거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고 이에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북한도 99일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선포합니다.

미국과 소련이 그어놓은 38도선은 그대로 남북한의 분단선이 됩니다.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반민 특위)를 설치합니다.

처벌 대상 1호는 일제 강점기 백화점 사장 박흥식으로 비행기를 일본에 헌납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광수, 최남선과 같은 지식인, 일제 고문 경찰로 악명 높았던 노덕술까지 일제의 식민 지배에 협력했던 친일파들이 잡혀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 청산에 비협조적이었습니다.

이승만 정부를 뒷받침하던 세력중에 친일 인사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은 국회에 반민족 행위 처벌법 개정을 요구하는 한편 노덕술이 검거되자 숙련된 경찰관을 잡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승만 정부가 비협조적이자 경찰이 반민 특위를 습격하는 일도 발생합니다.

반민 특위 소속 의원 중 일부를 공산당과 내통했다는 구실로 구속하기도 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반민족 행위자에 대한 공소 시효를 축소하는 방법으로 반민 특위를 와해시킵니다.

결국 친일파 처단은 이렇게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재판을 받아 실형에 처한 것은 10여 건에 불과하였는데 결국 식민 잔재 청산은 미완의 과제로 남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과제는 일제 강점기에 너무도 고통받았던 국민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이는 농지개혁으로 추진됩니다.

제헌 국회는 1949년에 농지 개혁법을 제정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다음 해 3월부터 유상 매수, 유상 분배 방식을 원칙으로 하는 농지 개혁을 시행했습니다.

1950625일 북한이 기습적으로 남침하면서 625전쟁이 발발합니다.

북한군은 치밀하게 준비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옵니다.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7월 말에는 낙동강 유역까지 쭉 밀고 내려왔습니다.

이승만은 대전대구를 구쳐서 부산으로 피란하고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합니다.

한편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참전을 결의합니다.

미국을 비롯하여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이 남한에 파견되었습니다.

16개국은 미국, 영국, 호주, 에티오피아, 네덜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콜롬비아, 프랑스, 필리핀, 터키, 룩셈부르크, 태국, 그리스, 남아공, 벨기에입니다.

유엔군과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합니다.

그리고 곧이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면서 전세를 역전시킵니다.

928일 서울을 되찾은 국군과 유엔군은 여세를 몰아 38도선을 돌파하여 평양과 원산을 점령하고 압록강 유역까지 도달합니다.

그런데 이때 중국군이 개입합니다.

625전쟁은 중국군 개입 전후로 나뉠만큼 중국군의 참전은 중요한 사건입니다.

압록강을 건넌 중국군은 대규모 병력을 앞세워 남쪽으로 진격합니다.

중국군의 공세에 밀려 흥남 철수가 이루어집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한강 이남으로 물러납니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총공세를 감행하여 서울을 되찾았지만 38도선 부근에서 북한군, 중국군과 서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집니다.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소련은 휴전을 제안하였고, 이에 미국과 소련이 협상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휴전 협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625전쟁으로 수백만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많은 이산가족과 전쟁고아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도로, 주택, 철도 등 사회 간접 시설도 대부분 파괴되었습니다.

625전쟁은 우리 민족끼리 서로 상처를 입힌 비극입니다.

전쟁은 어떠한 명분을 대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안되겠습니다.

625 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는 반공을 앞세워 정권 연장에 힘씁니다.

그런데 전쟁 직전에 치러진 제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인 후보들이 대거 당선됩니다.

이승만 정부가 각종 비리를 저지르고 반민 특위를 무력화시키며 국민의 기대를 저버린 결과였습니다.

이에 이승만은 자유당을 창당하고 직선제로 개헌을 추진합니다.

그러나 야당 의원이 다수인 상황에서 개헌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을 강제로 연행하여 억류하기로 합니다.

국회 의원들이 타고 가는 통근 버스를 통째로 군용 크레인에 연결해 헌병대로 끌고 갑니다.

그리고 정치 깡패와 경찰들의 감시 속에서 표결을 기립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그렇게 협박 속에서 공개 투표를 했으니 개헌안이 통과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1952년 전쟁 중 부산으로 피란 간 상황에서 이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사실 국민들은 전쟁 중에 대통령을 바꾼다는 걸 불안해할 수 있습니다.

이승만은 바로 그 점을 믿고 승부수를 던져서 성공한 겁니다.

결국 이승만의 재임을 위한 1차 개헌이 통과됩니다.

 

그런데 무소속 후보인 진보 성향의 조봉암이 예상보다 더 만흔 표를 얻습니다.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갑작스레 사망하여 표가 조봉암 후보 쪽으로 몰린 것도 있겠지만 조봉암이 농지 개혁법 시행 당시 농림부 장관을 맡으면서 농지 개혁을 통해 농민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준 것도 큰 이유였습니다.

게다가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됩니다.

위기를 느낀 이승만은 1958년 보안법 파동을 일으켜 국가 보안법을 개정합니다.

조봉암이 진보당을 창당하고 평화 통일론을 주장하자 이승만 정부는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키고 진보당을 해체합니다. (진보당 사건)

그로부터 52년 뒤, 2011년이 되어서야 조봉암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습니다.

이승만 정부에 의해 사법 살인이 자행된 것이었습니다.

또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비판적으로 다룬 진보성향을 경향신문을 폐간하는 등 언론도 억압합니다.

 

1960년 대선은 부통령이 누가 될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된 것인데 부통령 후보로 자유당에서는 이기붕, 민주당에서는 장면이 출마했습니다.

당시 자유당 후보인 이기붕은 인기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반면 장면은 이미 지난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를 제치고 부통령이 된 사람입니다.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장면을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대대적인 부정 선거를 벌이게 됩니다.

그것이 315부정 선거입니다.

자유당과 이승만 정부는 막걸리 한잔 사주고 고무신도 나눠주고 돈을 뿌리면서 유권자들을 매수합니다.

그런데 돈만 받고 안 찍을 수도 있으니 3인 또는 5인조로 짝을 지어 투표소로 보냅니다.

또한 야당 참관인이 투표소 참관을 못 하도록 방해하고 미리 찍어놓은 표가 담긴 투표함으로 투표함을 통째로 바꿔치기까지 합니다.

이걸 지켜본 국민들은 분노하게 되는데 특히 학생들을 중심으로 부정선거 반대 시위가 벌어집니다.

315부정 선거가 있기 전 대구에서는 학생들이 야당 후보 유세장에 못 가도록 일요일 등교 조치를 내립니다.

그러자 대구 시내 고등학생들이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입니다. (228민주운동)

 

419 혁명을 계기로 그동안 억눌려왔던 각계각층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장면 정부는 시민들의 다양한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이 상황을 위기로 바라보는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정치 군인들입니다.

그들은 북한이 남한을 호시탐탐 노리는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자유를 허용하면 오히려 사회 혼란이 올테고 그 순간 북한이 침투할 거라 본겁니다.

그래서 제한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고요. 결국 장면 정부는 출범한지 1년도 안 되어 1960년에 516군사 정변으로 붕괴됩니다.

419 혁명으로 분출된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요구는 이렇게 가로막히고 만 겁니다.

군사 정변 세력을 반공을 국가 정책의 기본 방침으로 내걸고 혁명 공약을 발표하였으며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박정희를 필두로 만든 국가 재건 최고 회의에서는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사안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정보를 수집하는 중앙정보부를 만듭니다.

처음에는 2년뒤 정권을 넘기고 군대로 복귀할 것을 약속합니다.

민간 정부로의 이양 시기가 다가오자 군사 정부는 입장을 바꿉니다.

의원 내각제와 양원제가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 않는다며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 국회 구성을 골자로 하는 5차 개헌을 추진합니다.

박정희는 민주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윤보선을 누르고 당선됩니다.(1963)

박정희 정부는 겉으로는 민간 정부의 모양새를 취한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군사 정변을 일으킨 세력들이 주도한 정권이었습니다.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취약한 정통성을 만회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장면 정부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보완해 국가 주도의 경제 성장을 적극 추진합니다.

 

한편, ,,일 동맹을 강화한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에 파병합니다.

베트남 전쟁 파병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파병에 대한 보상 조치로 1966년 브라운 각서가 체결됩니다.

베트남 파병은 1964년 비전투 부대를 보내면서 시작되었고 1965년부터 1973년까지는 전투 부대가 투입됩니다.

파병 비용은 대부분 미국이 지불하였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경제적 지원은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됩니다.

또 파병 군인들의 송금, 군수 물자 수출, 건설 업체의 베트남 진출 등 이른바 베트남 특수로 우리나라는 경제 발전에 동력을 얻게 됩니다.

1차 경제 개발 계획 시기에 우리 경제가 크게 성장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박정희는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을 누르고 재선에 성공합니다.

그런데 1968년 남북 관계에 안 좋은 일들이 잇달아 벌어집니다.

북한이 보낸 무장 게릴라가 박정희를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를 습격합니다.

우리 군과 경찰은 북악산에서 게릴라를 소탕했고 남북 간의 긴장이 높아졌습니다.

박정희는 이 북한발 위기를 이용해 대통령의 3회 연임을 허용하는 3선 개헌을 추진합니다.

야당 의원과 학생, 시민들은 격렬하게 반대 시위를 이어나갑니다.

하지만 여당 의원들만 따로 모여 편법적으로 개헌안을 통과시킵니다.(1969, 3선 개헌)

이후 1971년에 실시된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또 당선됩니다.

이때 대통령 선거의 야당 후보로 나온 인물이 바로 김대중입니다.

박정희는 압도적 표차로 이길 것을 예상했지만 막상 개표 결과를 보니 큰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의 고민은 다시 시작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1969년 닉슨 독트린이 발표됩니다.

트루먼 독트린이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였다면 닉슨 독트린은 냉전이 완화되는 해빙기를 상징합니다.

지금까지 반공은 박정희 정부의 중요한 정권 유지 수단이었습니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자 대북 정책을 바꿉니다.

박정희 정부는 장기 집권에 대한 반발을 누르고 국민의 안보불안을 해소하고자 1972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합니다.

 

197212, 유신 헌법에 따라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박정희가 또다시 대통령에 선출됩니다.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은 지병 치료를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서 반유신 활동을 전개합니다.

이것은 박정희 정부에게 큰 위협이 되어서 김대중을 도쿄의 한 호텔에서 납치합니다.

김대중은 바다에 수장될 뻔했으나 극적으로 구출되어 서울의 자택으로 돌려보내집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신 반대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됩니다.

장준하, 백기완 등 민주 인사들은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쳤고 대학생들은 유신 헌법 폐지와 노동 악법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합니다.

장준하, 문익환, 윤동주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였습니다.

장준하는 광복 이전에는 한국 광복군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가로 활동했고, 광복 이후에는 김구의 비서로 조국에 들어와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 합니다.

그런 그가 유신 반대 운동을 전개하던 중 등산을 갔다가 실족사하게 되는데 아직 많은 의문이 남아있습니다.

이처럼 반유신 운동이 확산되자 박정희 정부는 긴급 조치를 발표하여 이를 억압합니다.

심지어 인민 혁명당이라는 간첩단을 조작하여 관련자들을 잡아들입니다.

이를 2차 인혁당 사건이라고 하는데 북한의 인민 혁명당이 학생 운동을 조종하며 국가 전복을 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관련자 8명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이 확정된 다음 날 기습적으로 사형이 집행됩니다.

 

197910월 김영삼의 정치적 근거지인 부산, 마산에서 유신 철폐와 독재 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됩니다.

이것이 부 마 민주 항쟁입니다.

박정희 정부 안에서는 부 마 민주 항쟁의 처리 방법을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합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합니다.

유신 독재는 그렇게 끝이 났고 국민들은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10.26 사태가 일어나자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되어 전국에 계엄령을 내립니다.

국민들의 바람대로 유신 헌법을 폐기하고 민주적 절차에 따라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 했지만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은 일단 새 대통령을 선출한 뒤 헌법을 개정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합니다.

126,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그리고 10.26 사태 진상 조사를 위해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됩니다.

19791212, 국가적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두환, 노태우 등이 주도하는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합니다. (12.12 군사 반란)

박정희에 이어 다시 등장한 이들 정치 군인을 신군부라고 불렀습니다.

신군부는 계엄령을 계속 유지하고 헌법 개정을 지연시키며 군사 독재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아직 대학 캠퍼스에는 탱크가 서 있고 무장한 군인들이 거리를 돌아다녔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올 거라 믿었습니다.

겨울 공화국의 긴 터널을 빠져나왔으니 이제 곧 민주주의가 찾아오리란 희망과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신군부의 정권 장악에 맞서 1980년 봄부터 학생과 민주 인사를 중심으로 신군부 퇴진, 계엄령 철폐, 유신 폐지를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이 이어집니다.

이를 서울의 봄이라 합니다.

515일에는 서울역에서 무련 10만여 명의 시민이 모인 대규모 시위가 벌어집니다.

학생과 시민들은 유혈 사태 발생을 걱정하며 자진 해산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신군부는 게엄령의 전국 확대로 대응했습니다.

민주 인사와 학생 대표를 체포했으며 국회와 대학을 폐쇄하고 시위를 금지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굴하지 않은 지역이 있었는데 바로 전라남도 광주였습니다.

1980518, 계엄령이 발동되고 휴교령이 내려지자 전남대학교 앞에서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와 휴교령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납니다.

군인들의 무자비한 진압에 대항하여 518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신군부는 공수 부대원을 추가로 투입하여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을 진압하고 일반 시민들도 곤봉으로 내려찍고 닥치는 대로 끌고 갑니다.

 

국가 폭력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담음 518 민주화 운동관련 기록물은 2011년에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며, 그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자유를 위한 투쟁은 한순간 실패한 듯 보일지라도 종국에는 반드시 승리한다는걸 보여주었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전두환을 상임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를 조직합니다.

박정희가 국가 재건 최고 회의라는 강력한 조직을 만들어서 권력을 장악하고 국민을 통제했던 것과 유사합니다.

국보위는 사회 정화를 명분으로 삼청 교육대라는 기관을 만듭니다.

폭력배뿐만 아니라 신군부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끌고가 군대식 훈련과 노동을 강요합니다.

저항의 싹을 미리 잘라버리려 한 것입니다.

또한 국보위는 최규하 대통령을 물러나게 하고 통일 주체 국민 회의를 통해 전두환을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합니다.(1980.8.)

 

전두환 정부는 반성은커녕 국민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4.13호헌 조치를 발표합니다.

호헌은 헌법을 수호한다는 뜻인데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려 한 것입니다.

전두환 정부는 노태우를 체육관에서 다음 대통령으로 선출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에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였고 민주 헌법 쟁취 국민 운동 본부가 결성되어 전국적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전두환 정권의 퇴진 운동이 전개됩니다.

그러던 중 시위에 참여한 대학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서 쓰러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를 계기로 수십만 명의 시민들은 610일 전국에서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합니다.

6월 민주 항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학생들부터 넥타이 부대라고 불리는 직장인들까지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민중의 민주주의를 향한 에너지는 엄청났고 결국 전두환 정부는 국민들의 요구에 굴복합니다.

여당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의 내용을 담은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합니다.

6.29 민주화 선언으로 드디어 직선제를 핵심으로 하는 9차 개헌이 이루어집니다.

9차 개헌의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직선제 개헌 이후 첫 대선에서 여당은 노태우를 야당에서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둘 다 후보로 나옵니다.

김영삼과 김대중으로 표가 분산되면서 결국 노태우가 역대 최저 득표율로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김영삼 정부는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통해 전두환과 노태우를 법정에 세웁니다.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에게 반란과 내란의 죄목으로 실형이 선고 됩니다.

또 지방 자치제를 전면 실시하고 탈세와 불법 자금 유통을 막기 위해 금융 실명제를 시행합니다.

그러나 1997년 외환 위기를 맞으면서 국제 통화 기금(IMF)의 구제 금융을 받게 됩니다.

같은 해 12월에는 대통령 선거를 통해 헌정 사상 최초로 여야 간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집니다.

15대 대통령으로 김대중이 당선됩니다.

김대중 정부는 기업 구조 조정, 외국 자본 유치 등을 추진해 외환 위기를 극복하고 국제 통화 기금의 자금을 조기 상환합니다.

그리고 이른바 햇볕 정책이라는 대북 화해 협력 정책을 전개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2000년 평양에서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이 열립니다.

2003년에는 권위주의 청산을 주장한 여당의 노무현이 당선됩니다.

노무현 정부는 대북 화해 협력 정책을 이어나가고, 과거사 정리 사업을 추진합니다.

2007년 경제 성장을 내세운 야당의 이명박이 당선돼 정권 교체가 이루어집니다.

그 뒤를 이어 창조 경제와 문화 융성을 내세운 여당의 박근혜가 당선됩니다.

박근혜 정부는 메르스, 세월호 참사 등에서 국정에 소홀한 모습을 보였고 대통령의 비선 실세 의혹까지 대두되면서 국민의 실망감이 커졌습니다.

시민들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촛불 집회를 열어 대통령 탄핵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국회는 탄핵 소추안을 가결하고 헌법 재판소는 대통령 박근혜의 파면을 선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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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pN4m4CshpQ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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