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칼로 얼음 깨 여기저기 돌리니(鸞刀擊碎四座) 느닷없이 대낮에 피어나는 안개처럼 새하얀 얼음 가루(空裏白日流素霰).” 조선 문인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은 시 ‘착빙행(鑿氷行)’에서 부잣집 여름 별미를 이렇게 표현했다. 냉동기술이 없던 그 옛날, 한여름 얼음은 있는 집에서나 즐길 수 있던 호사였다.
그런데 수백년이 지나 얼음이 흔해진 현대사회에서 빙수는 여전히 여름철 ‘스몰 럭셔리(작은 사치)’ 취급을 받고 있다. 한 그릇에 10만원이 넘는 호텔 빙수들이 나오면서다. 선 넘은 가격에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호텔 빙수 인증샷이 끊임없이 올라오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하지만 럭셔리 빙수만 있는 것은 아니다. 1만원 이하 제품도 빙수 마니아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올여름 ‘극과 극’ 전략을 내세운 빙수 시장을 들여다봤다.
서울신라호텔 애플망고 빙수 10만2000원
여름철 대중 간식 → 한입 사치로
빙수는 기원전 3000년부터 인류와 함께했다. 중국에서 눈과 얼음에 꿀, 과일즙을 섞어 먹은 것이 유래라고 한다. 이탈리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최초로 시작된 얼음 우유를 베네치아로 가져가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얼음은 왕이 하사해야 맛볼 정도로 귀한 존재였지만, 일제강점기 제빙기술이 도입되자 빙수는 대중적인 음식이 됐다. 1921년 동아일보는 ‘경성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빙수집이 187곳, 조선인이 운영하는 빙수집이 230곳으로 도합 417곳’이라고 기록했다. 여름철 고위 관료만 맛보던 호사를 누구나 즐기게 된 것이다. 빙수는 그 뒤로도 수십년간 서민의 여름 별미로 활약했다. 그중 팥과 떡을 고명으로 얹은 ‘팥빙수’가 대세였다. 여름철 빵집에서는 팥빙수를 시즌 메뉴로 내놨고, 집에서도 팥과 얼음을 얹은 빙수를 만들어 먹었다. 1990년대 외식산업이 발전하면서 프랜차이즈 식당에서도 빙수 메뉴가 등장했고, 팥을 즐기지 않는 소비층을 겨냥해 과일과 젤리를 올린 빙수들이 나왔다.
빙수 업체는 유행에 따라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과일이 듬뿍 담긴 빙수로 2000년대 인기몰이를 했던 캔모아는 커피 열풍에 밀려났고, 팥맛으로 승부를 보던 밀탑도 2021년 현대백화점 매장을 철수하며 빙수 제왕의 자리를 내줬다.
2010년 부산에서 시작한 퓨전 떡 카페 ‘시루’는 인절미 빙수를 내놓으며 ‘설빙’ 브랜드를 시작했다. 이어 2018년 빙수 업계 최초로 배달 애플리케이션에 입점한 설빙은 빙수를 사시사철 즐기는 K디저트로 자리매김시켰다.
특급호텔도 빙수 경쟁에 뛰어들었다. 2008년 제주 신라호텔은 제주 망고 농가를 돕기 위해 ‘로컬 식재료 발굴’ 프로젝트를 통해 빙수를 선보였다. 입소문을 타면서 2011년부터는 서울 신라호텔에서도 판매가 시작됐다. 이후 특급호텔들이 너도나도 고가 빙수 메뉴를 내놓으면서 ‘럭셔리 빙수’ 시장이 형성됐다.
인터컨티넨탈 코엑스 ‘로비 라운지’ 밤양갱 팥빙수 3만5000원
고물가 시대, 가성비 내세운 빙수 시장
빙수의 재료는 다양해지고, 크기도 커졌다. 과일과 단맛으로 무장한 빙수 한 그릇의 칼로리는 1000㎉를 훌쩍 넘기도 한다. 재료가 풍성해진 만큼 가격도 오름세다.
호텔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프랜차이즈 카페의 빙수 역시 올해 가격이 소폭 올랐다. 투썸플레이스의 애플망고 빙수와 우리팥빙수는 각각 1만4000원, 1만2000원으로 작년보다 500원, 1000원 올랐다. 엔제리너스는 지난해 선보인 망고 빙수(1만2000원)보다 2000원 비싼 가격으로 올해 신제품인 복숭아 빙수(1만4000원)를 출시했다. 업계 관계자는 “원재료가 오른 데다 인건비 상승 요인이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빙수의 주재료인 국내산 팥의 중도매 가격은 5월27일 기준 40㎏당 49만7400원으로 전년 동기(40만4900원) 대비 20%가량 올랐다.
이디야커피 망고요거놀라 빙수 6300원
하지만 아직 1만원 이하로 빙수를 즐길 수 있는 곳도 있다. 이디야커피는 가성비를 앞세운 ‘1인 빙수’ 3종을 판매 중이다. 팥인절미 빙수, 망고요거놀라 빙수, 초당옥수수 빙수 등 1인 빙수의 가격은 6300원이다. 이디야커피 측은 “합리적인 가격에 혼자서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1인 빙수’ 3종은 전체 빙수 판매량의 약 80%를 차지한다”며 가성비를 앞세운 빙수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밝혔다. 엔제리너스 팥빙수 2종도 7000~8000원대다.
호텔 중에서도 ‘가성비’를 앞세운 곳이 있다. 파르나스 호텔이 운영하는 인터컨티넨탈 코엑스 ‘로비 라운지’에서 올해 처음으로 선보인 ‘밤양갱 팥빙수’와 ‘토마토 빙수’의 1인용 가격은 3만5000원이다. 타 호텔에서 고가에 판매되는 망고 빙수도 1인용 메뉴로 4만2000원에 선보였다. 파르나스 호텔 관계자는 “원래 2022년까지 판매하던 1인용 빙수를 지난해 출시하지 않았는데, 다시 메뉴로 만들어달라는 민원이 많이 들어왔다”면서 “현재 전체 빙수 주문의 30%가 1인 빙수일 정도로 인기가 좋다”고 설명했다.
고가 빙수 시장의 문을 연 제주신라호텔도 지난 4월 한 달간 쁘띠 애플망고 빙수를 3만원에 판매하기도 했다. 여름에 판매하는 애플망고 빙수와 같은 품종인 제주산 애플망고를 사용했지만 기존 망고보다 사이즈가 작다. 신라호텔 관계자는 “사이즈는 좀 작지만 맛은 뒤지지 않는 망고를 미리 맛보도록 한정 출시했던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10만원 훌쩍…호텔 빙수 가격 ‘고공행진’
전반적으로 특급호텔의 망고 빙수 가격은 고공행진 중이다. 호텔 업계도 원가 상승을 주요인으로 꼽았다. 제주농가에 따르면, 최상품 제주산 애플망고는 5개에 15만원을 넘어선다. 특급호텔 한 관계자는 “빙수에 최상품 국산 망고 1.5~2개를 그대로 사용하는 데다 토핑으로 올라가는 부재료들도 가격이 모두 올라 원가가 판매가의 65%를 넘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현재 가장 비싼 빙수는 시그니엘 서울 79층 ‘더 라운지’에서 판매하는 프리미엄 제주 애플망고 빙수다. 지난해(12만7000원)보다 2.4% 인상된 13만원에 판매되고 있다. 포시즌스 호텔 서울은 지난해 제주 애플망고 빙수의 가격을 전년보다 31% 올린 가격(12만6000원)을 올해도 적용했다.
서울신라호텔도 올해 애플망고 빙수 가격을 지난해(9만8000원)보다 4.1% 오른 10만2000원으로 책정했다. 파라다이스 시티(9만5000원), JW메리어트동대문스퀘어서울(9만3000원), 롯데호텔 서울(9만2000원), 페어몬트 앰배서더 서울(9만원), 시그니엘 부산(8만원), 안다즈 서울 강남(7만5000원), 그랜드 워커힐 서울(7만3000원) 등도 고가 빙수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해보다 빙수 가격을 내린 호텔도 있다. 더블트리 바이 힐튼 서울 판교는 애플 망고 빙수 가격을 지난해(8만5000원)보다 내린 7만7000원에 책정했다. 망고 수급을 안정적으로 하게 되면서 풍성한 재료는 그대로 살리고 가격만 내렸다고 호텔 측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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