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대한 우리의 확신과 실제 정확도 사이에는 상관 관계가 없다고 한다. 유난히 세세하고 선명하게 느껴지는 '섬광 기억'(예를 들어: 9/11 때 어디에 있었는가?)은 정확하다고 굳게 믿지만, 사실은 잘못 되었을 가능성이 다른 시시한 기억들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가 목격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주의깊게 프레임을 짠 질문을 던지면 목격자들 역시 신뢰하기 힘들며 쉽게 조작 당한다는 게 밝혀졌다.
신경 과학의 관점에서는 시간이 흐르며 기억이 변하는 것은 직관적이지 않다. 도널드 헵, 에릭 캔델 등의 선구적 연구들은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안정적이 되어야 한다고 결론내린다. 시냅스의 강화가 기억을 형성하는데, 한 번 형성되면(굳으면) 안정적이 된다고 여겨진다. 최근 PTSD의 치료 가능성으로 뉴스에 등장한 재강화 과정은 형성된 기억을 조정하고 바꾸는 메커니즘이 된다. 기억은 다시 떠올릴 때마다 재활성화되며, 변화할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가 된다. 그때 '재강화', 즉 뇌에 다시 저장이 된다.
기억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면 우려가 든다.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믿고, 삶에서 언제나 기억에 의존한다. 하지만 기억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그건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통합할 수 있는 능력, 내러티브를 만들고 우리 경험을 이해하는 능력의 기반이다. 섁터는 기억의 '잘못'들은 사실은 적응을 위한 특징의 부산물이며, 그 잘못 자체가 적응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한다. PTSD의 예로 돌아오면 변할 수 있는 기억의 성질 때문에 우리는 특정 기억과 연관된 부정적 감정들을 없앨 수 있다. 섁터가 꼽은 7가지 잘못 중 하나는 편견이다. 과거의 태도(예를 들면 정치적 의견)를 실제보다 현재의 믿음에 더 가까운 것으로 기억하려 하는 경향도 여기에 포함된다.
우리의 기억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예술가는 프루스트 만은 아니다.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에는 녹아내리는 시계가 등장한다. 제목과 병치된 시계는 기억은 지속되지만, 꼭 원래 형태대로 남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보다 덜 유명한 '기억의 지속의 붕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억의 지속'을 벽돌 같은 단위로 분해하고 있다. 이 작품은 서로 닿아있지 않은 원자로 구성된 물질을 보여주는, 물리학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는 해석도 있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1904~1989)의 대중적 인기는 세월이 지나도 식을 줄 모른다. 빳빳하게 틀어 올린 콧수염과 휘둥그레 치켜뜬 두 눈, 이토록 인상적인 초상 사진에서 작가의 광기와 천재적인 상상력이 번득인다. 불안증, 편집증, 과대망상증, 성적판타지는 달리의 삶과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이고, 그는 이로부터 오는 고통과 복합적 감정을 맘껏 작품에서 표출시켰다.
'기억의 지속'은 달리의 그림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1931년 초현실주의 그룹이 뉴욕에서 전시할 때 처음 발표된 이 작품을 통해 달리는 국제적인 명성을 단숨에 얻게 된다. 회중시계들이 흐물흐물 늘어난 이 수수께끼 같은 그림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림을 보면, 위에서 3분의1이 조금 못 되는 지점에는 해안선이, 우측에는 바위 언덕이, 앞쪽 좌측에는 사각으로 반듯하게 잘려진 흙더미 같은 상자가 보인다. 그 옆에는 바다동물처럼 보이는 이상한 형상이 널브러져 있다. 종을 알 수 없는 이 이상한 동물 위에 회중시계 1개가, 또 상자 위에 회중시계 3개가 놓여 있다. 왼쪽 맨 앞 붉은색 회중시계를 제외하고 나머지 3개는 죽은 나뭇가지, 상자, 널브러진 바다동물의 척추 위에 엿가락처럼 늘어난 상태로 걸쳐져 있다. 유일하게 원래 형태를 유지한 붉은색 회중시계 내부에는 개미떼가 바글거리고 있다.
이 그림은 달리가 가족들과 인연을 끊은 직후에 만들어졌다. 당시 27살이었던 달리는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시인 폴 엘뤼아르의 아내 갈라와 막 사귀기 시작했고, 부모는 이 불륜관계를 극렬히 반대했다. 이후 달리의 부인이 된 갈라는 작가의 뮤즈인 동시에 그를 평생 동안 괴롭힌 인물이기도 하다. 말년에는 갈라의 불륜으로 달리는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 또한 이 그림을 그릴 무렵 달리는 초현실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편집증적 비평'(paranoïaque-critique)이라 명명한 작품제작 방식을 발전시킨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서구인의 의식을 지배해온 이성주의, 합리주의에 반대하는 초현실주의 이념처럼 달리의 독특한 작품제작 방식 또한 상식을 벗어난 현상들의 자유로운 해석에 기반을 둔 비이성적이고 즉흥적인 방법으로 환각과 아이디어를 접목시킨다.
'기억의 지속'의 탄생 비하인드 스토리는 좀 엉뚱하다. "친구들과 극장에 가기로 약속한 저녁, 난 너무 피곤하고 편두통도 있어서 그냥 집에 남아 간단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접시 위에서 아주 숙성이 잘 돼 줄줄 녹은 까망베르 치즈를 보는 순간, 한동안 정지된 상태로 있다가 곧장 작업실로 가서 작업 중인 그림을 바라보았다. 해안 절벽이 늦은 아침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그림에 나는 놀랄만한 이미지를 추가하고 싶어졌다. 작업실 전등을 끄고 창밖에서 들어오는 달빛 아래, 원래 그리려고 했던 마른 올리브 나뭇가지 위에 까망베르 치즈처럼 녹은 시계를 추가했다."('살바도르 달리 삶의 비밀', 1952 중) 평온해 보이는 해안에 비해 시계들은 가차 없이 녹아버리며 작가의 강박적인 감정을 그대로 녹여낸다.
그림 속 바위 언덕은 달리의 고향에서 가까운 해안 까다께스 풍경에서 나왔다. 달리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 3년 전에 죽은 형의 이름인 살바도르를 동생에게 그대로 붙여주었다. 달리는 일생 죽은 형의 삶을 대신한다는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녹아내리는 시계, 개미떼로 뒤덮인 시계는 죽음을 연상시킨다. 달리는 이 그림을 통해 속절없이 흘러가버리는 시간, 즉 죽음에 대한 강박증과 불안감을 표현하고 있다.
'기억의 지속'에서 시계는 물리적으로 시간을 나타내는 기구가 아니고 사람이 인식하는 시간 개념을 담고 있다. 우리 모두는 삶을 지배하고 있는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달리는 이 그림에서 시간의 늘어남과 시간·공간의 불가분성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시간은 경직되어 있지 않고 흘러내리는 공간과 일체가 됨으로써 사람이 인식하는 시간의 유연함을 보여준다. 늘어나는 시계는 인간의 힘으로 멈출 수 없는 물리적-천체 시간의 흐름과는 별개인 심리적 내면의 시간을 나타낸다.
출처: huffpost,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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