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이해하기(22) 신사임당 - 초충도
바래고 찢긴 화폭 속에 중년 부인이 꽃가지를 들고 앉아 있다. 풍성한 흰 치마와 노란 저고리가 눈에 가득 들어온다. 앞가르마 얹은머리에 검은 눈동자가 뚜렷하다. 넓고 큰 얼굴은 전형적인 한국인의 모습이 분명하다. ‘신사임당 초상화’다. 조선 시기에 그린 여성 초상화는 매우 드물다. 더구나 ‘신사임당 초상화’처럼 임진왜란 전 그림은 더욱 희귀하다. 이 초상화는 1977년 3월 11일 세상에 알려지며 문화계를 시끄럽게 했다. 기자들의 전화와 학자들의 성화는 물론, 기증 요청 등이 빗발쳤다. 소장자인 골동상인 우당 홍기대(洪起大·95) 씨는 갑자기 일본 출장을 떠났다. 연락이 끊기자 겨우 잠잠해졌다.
홍씨가 2014년 펴낸 책 ‘우당 홍기대 조선백자와 80년’에 그 이야기가 소상하다. 1962~63년께 일이다. 자유당 때 국책회사 간부였던 사람이 소유한 조선백자 달항아리가 나왔다. 홍씨의 전문 분야인 백자는 바로 거래가 됐다. 하지만 같이 나온 초상화 한 점과 초충도 3점은 쉽지 않았다. 백자의 2배인 1000만 원을 호가했고, 가로세로 세 번씩 접어둬 구김새가 심했다. 바스러진 부분도 적잖았다. 홍씨는 어렵게 초상화를 인수한 후 상한 부분을 보존처리해서 유리액자에 넣어두었다. 그러던 중 ‘월간문화재’ 발행인 이원기 씨가 알게 됐고, 이종석 기자와 당시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이 함께 와서 봤다. 실물로 인정할 만한 근거는 충분했다. 화폭 상단 위에 가로로 ‘덕수이씨(德水李氏) 열로부인(洌老夫人) 신사임당영지(申師任堂影之)’라 썼고 ‘덕수세가(德水世家)’ 등 도장들이 여기저기 찍혀 있다. 하지만 뒤에 검토한 초상화 전공자 가운데는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한 사람도 있었다. 최순우 관장과 다른 견해가 나오기도 했다.
조선 여성을 그린 초상화는 매우 희귀하다. 일본에 있는 하륜(河崙) 부인 상반신상 등 몇 점만 알려졌다. 남녀유별을 강조한 사회에서 감히 여자가 외간 남자에게 얼굴을 드러내놓고 그리게 할 수 없었다. 지금 홍씨는 이 초상화를 갖고 있지 않다. 그의 집안이 잘못돼 갖고 있던 물건들이 흩어질 때 잃어버렸다고 한다. 처음 보도한 신문에는 원화 3분의 2 크기 흑백사진만 실렸다. ‘월간문화재’ 1977년 3월호에 컬러 표지로 실린 사진이 ‘신사임당 초상화’를 보여주는 유일한 자료가 됐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이목구비가 크고 서글서글하며 지성적인 얼굴이다. ‘신사임당 표준영정’은 1966년 김은호 화백이 그렸다. 최근에 널리 알려진 그림이 2009년부터 나온 5만 원권 지폐의 ‘신사임당 영정’이다. 이종상 화백이 그린 화폐 인물은 여러 자료를 토대로 그렸다고 한다. 서로 비교하면 흥미롭다.
이 그림을 봤던 최순우 관장은 “능필은 아니지만 조선 중엽 그림의 격을 지니고 있다. 사임당의 아들 옥산과 딸 매창도 서화를 잘했으므로 그런 가족이 당시 제작한 영정일 것”으로 추정했다. 신사임당은 다양한 초충도로도 유명하다. 올해 하반기 방영 예정인 TV드라마 ‘사임당, the Herstory’에서는 초충도를 그리는 장면이 나올 예정이다. 시서화에 뛰어났던 사임당의 예술이 재조명될 듯하다.
이 그림 제목은 ‘수박과 들쥐’야. ‘초충도병(草蟲圖屛)’이란 병풍 가운데 한 그림이지. ‘초충도’는 ‘풀과 벌레를 그린 그림’이란 뜻이야. 초충도병은 병풍 그림이라 무려 여덟 장이나 되지. ‘맨드라미와 쇠똥구리’도 그중 하나야. 평범해 보이는 그림인데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 한번 들여다볼까?
● 하하 웃는 수박
와! 먹음직스러운 수박이 두 개나 달렸네. 그런데 저걸 어떡해! 쥐들이 신나게 수박을 파먹고 있어. 그런데 좀 이상하지? 수박이 하하 웃고 있잖아. 쥐들이 파먹은 곳은 입처럼 보이고, 씨앗은 이빨 같아. 쥐들이 자기 씨를 멀리 퍼뜨려주니 좋아서 그런가 봐.
오른쪽에 핀 붉은 꽃은 패랭이꽃이야. 꽃을 뒤집으면 옛날 장사꾼들이 쓰던 패랭이 모양과 비슷하다고 붙여진 이름이지. 위에는 나비 두 마리가 날아다녀. 오른쪽 나비는 굉장히 화려하지? 사람들의 눈길을 확 끄는 색깔과 모양을 한 제비나비야. 왼쪽은 나방이고. 나비보다 몸이 통통하잖아.
신사임당, ‘초충도병’ 가운데 ‘수박과 들쥐’, 종이에 채색, 33.2X28.5cm, 국립중앙박물관 / 신사임당, ‘초충도병’ 가운데 ‘맨드라미와 쇠똥구리’, 종이에 채색, 33.2X28.5cm, 국립중앙박물관
● 유일한 여성화가
초충도병을 그린 화가를 알아볼까? 아주 특별하고 유명한 분이지. 바로 이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년)이야. 신사임당은 예로부터 멋진 어머니의 대표로 꼽히는 분이야. 아들 이율곡을 위대한 학자로 키웠으니까. 하지만 신사임당은 멋진 어머니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예술가였어.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지만, 어머니의 역할에 묻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
신사임당은 풀과 벌레 그림의 전문가였어. 심지어 진짜 벌레인 줄 알고 닭이 와서 신사임당의 그림을 쪼았다는 얘기까지 있단다. 5000원짜리 지폐를 꺼내봐. 앞면은 이율곡 초상, 뒷면이 바로 신사임당의 초충도야. 여기 실린 그림과는 또 다른 작품이지.
그런데 신사임당은 왜 하필 이런 풀·벌레 그림만 그렸을까? 조선시대 여자들은 바깥출입이 어려워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기 때문일까? 아니야, 여기에는 중요한 까닭이 있어. 바로 신사임당이 어머니였기 때문이야. 자식들이 잘 자라고 남편이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기를 바랐던 엄마의 마음 때문이지. 그게 풀·벌레 그림과 무슨 상관이냐고?
● 가족의 행복을 빌다
초충도병에 나오는 풀·벌레는 모두 나름대로 의미를 갖고 있어. 먼저 수박 그림부터 다시 볼게. 그림 속 패랭이꽃은 장수와 젊음을 뜻해. 옛 화가들은 오래 살란 의미로 이 꽃을 그렸지. 나비는 무슨 뜻일까? 나비는 알, 애벌레, 번데기를 거치는 변태를 하잖아. 새롭게 거듭나서 훌륭한 사람이 되란 뜻이지. 그렇다면 수박은 뭘 뜻할까? 씨가 많으니 자식을 많이 낳으란 뜻이야. 옛날엔 자식 많은 게 행복이었잖아. 또한 쥐는 ‘쥐처럼 부지런히 일해서 부자 되세요!’란 뜻이래. 자, 이제 수박 그림이 어떤 뜻인지 쭉 연결해봐. 그렇지. ‘자식 많이 낳고, 부지런히 일해서 돈 많이 벌고, 훌륭한 사람 돼서 오래오래 살라’는 뜻이야. 좋은 말만 죄다 모아놓았네. 이처럼 초충도병 8폭은 아무렇게나 그린 그림이 아니야. 어머니의 간절한 소원이 담겨 있지. 가정의 행복을 비는 간절한 기도라고 할 수 있어.
'초충도(草蟲圖)'라고 하면 신사임당이 떠올라요. 풀 초(草), 벌레 충(蟲), 그림 도(圖), 풀과 벌레를 그린 그림이지요. 주로 여러 꽃을 피우는 식물과 여치·메뚜기·잠자리 같은 곤충, 개구리·도마뱀·쥐 같은 동물을 함께 그렸어요. 조선 시대에 여러 초충도가 그려졌지만, 신사임당이 가장 유명하지요.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 중에도 수박이 등장하는 그림이 있어요. 먹음직스러운 수박 두 덩이가 패랭이꽃이 핀 뜰에 뒹굴고 있고 생쥐 두 마리가 정신없이 큰 수박을 갉아 먹고 있어요. 그 뒤 넝쿨 주변으로 나비 두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네요. 수박과 들쥐가 인상적인 그림이어서 '수박과 들쥐'라고도 부른답니다.
수박은 아프리카가 원산지로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재배됐고, 서역을 거쳐 중국 송나라와 고려에 전해졌어요. 조선 중기의 문신인 허균은 우리나라 팔도의 명물 토산품과 별미를 소개한 '도문대작'이란 책을 썼는데, 그 책에 '고려를 배신하고 몽골에 귀화해 고려 사람을 괴롭힌 홍다구가 처음으로 개성에 수박을 심었다'라고 썼어요. 홍다구는 고려 충렬왕 때의 인물로, 고려에 몽골 감독관으로 와서 머무는 동안 온갖 행패를 부렸던 인물이에요.
조선왕조실록 세종 5년 기록에 '환자 한문직이 주방을 맡고 있더니 수박(西瓜)을 도둑질해 쓴 까닭에 곤장 100대를 치고 영해로 귀양 보냈다'란 내용이 있어요. 환자는 내시를 말하는데, 궁궐의 주방에서 일하는 내시가 수박을 훔친 죄로 곤장을 100대나 맞고 먼 곳으로 귀양까지 가야 했다니 당시에 수박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나 봐요. 수박이 그림의 소재로 등장할 정도로 널리 재배된 것은 조선 중기 이후라고 해요.
출처: 조선에듀, 주간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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