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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만에 끝내는 세계사

[5분]만에 끝내는 기본 세계사 18편 - 영국의 명예혁명

by KS지식 - 문화 YouTube 2022.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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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만에 끝내는 기본 세계사 18편 - 영국의 명예혁명

14세기 이후에는 명망 있는 시민들이나 지방 기사들도 이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양원으로 구성된 영국 의회의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즉 귀족과 주교들은 상원을, 지방 기사와 시민들은 하원을 구성한 것입니다.

17세기 초까지 모든 왕과 여왕은 의회에 협조적이었으므로 양자 사이에 별다른 마찰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625년에 찰스1세가 왕위에 오른 뒤부터 사정은 달라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신에 의해 나라를 다스리도록 선택되었으며 모든 결정은 자기 판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의회와 영국 국민들은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고 왕과 의회 사이의 갈등은 몇 년간 계속되었고 1642년에는 결국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스스로를 신의 전사라고 칭한 철저한 청교도주의자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은 두 번의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후 크롬웰은 자기와 함께 싸우기를 거부하고 왕과 협상하려 했던 사람들을 모두 의회에서 내쫓았습니다.

남은 사람들로 구성된 의회는 찰스 1세를 법정으로 보냈고 이곳에서 사형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1649130, 찰스 1세는 런던의 왕궁 앞에서 참수형을 당했는데요, 한 나라의 국왕이 신하들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은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영국은 크롬웰을 정부 수뇌로 하는 공화정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크롬웰은 의회의 권한을 존중하지 안항ㅆ고 1653년에는 종신 직위인 호국경의 자리에 오른 뒤 군대의 힘을 빌려 마치 군부 독재자처럼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통치 방식에 있어 처형된 왕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크롬웰이 죽은 뒤 아들이 그의 직위를 승계했지만 너무나 무능하여 일년도 채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크롬웰식 공화정에 넌덜머리가 나있던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왕정의 복귀를 희망했는데 강력한 의회의 존재가 왕정 복귀의 전제 조건이었습니다.

16605월 찰스2세가 의회의 권한을 존중할 것을 서약하고 영국의 새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새 국왕 역시 절대주의적인 지배자가 되려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카톨릭교회와 가까웠던 국왕이 가톨릭교도들을 관직에 중용하자 의회는 모든 공직에서 가톨릭교도를 배제한다는 법률로 왕에게 저항했습니다.

윌리엄 공 부부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668년에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영국에 상륙했습니다.

영국 국왕은 프랑스로 피신했고 국왕의 군대는 싸우기도 전에 항복했으며 윌리엄 공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런던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즉위하기 전에 권리장전이라 불리는 문서에 서명해야 했는데 이 문서를 통해 영국의 의회와 시민들은 중요한 기본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법률을 공포하거나 폐지할 때는 반드시 의회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조세, 관세 역시 의회의 승인에 의해서만 징수할 수 있다. 의회의 결정권은 어떤 강제나 방해도 없는 상태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의회의 의원은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으며 면책 특권을 누린다. 즉 의원은 의회의 분명한 동의가 없는 한 형사 소추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회의 동의 없이는 국왕은 평화시에 상비군을 양성할 수 없다. 독립적인 법원이 법질서의 유지를 책임진다. 법원의 판결 없이는 그 누구도 처형되거나 감금되지 않는다.

이렇게 기본권리가 문서상으로 확정된 것은 1689년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영국인들이 말하는 명예혁명은 이렇게 완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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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에 더 자세한 내용이 있고 구독 & 좋아요는 더 좋습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CGmFr_iDw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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