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투리시간에 공부하는 한국사] - 36. 대한민국임시정부(1920년대)
제1차 세계 대전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전후 처리를 위해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는데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 자결주의 원칙을 제창하는데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는 실질적으로 민족 자결주의 원칙은 패전국의 신민지에만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도쿄에서도 유학생을 중심으로 2•8독립 선언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1919년 1월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일제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국내에서 한국인의 반일 감정이 커집니다.
종교계 지도자와 학생 대표들은 비밀리에 모임을 열어 고종의 국장일에 대규모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합니다.
천도교의 손병희, 기독교의 이승훈, 불교계의 한용운이 연합하여 33인의 민족 대표를 구성합니다.
은밀한 연락망을 통해 3월1일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탑골 공원으로 가던 민족 대표들은 엄청난 인파가 모여있던것에 놀라고
시위가 과격해질 것을 우려하여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이란 요릿집에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합니다.
만세 삼창을 한 후 일본 경찰에 통고하고 스스로 체포돼 종로 경찰서로 연행됩니다.
탑골공원에 모여있던 한국인들은 민족대표자들이 장소에 나타나지 않자 잠시 흔들리지만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를 주도합니다.
그곳에 모여있던 학생과 시민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평화 시위를 펄입니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제는 무차별 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지르는데요, 대표적으로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이 있습니다.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은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모이도록 하고 교회문을 밖에서 잠그고 23명의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합니다.
그리고 인근 고주리에서도 6명을 학살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교회와 민가에 불을 질러 마을 전체를 초토화 시킵니다.
당시 선교사로 한국에 왔던 스코필드가 참혹한 학살 현장을 담은 사진과 기록을 미국 언론에 보내면서 국제 사회에 일제의 만행이 알려집니다.
우리 민족 스스로도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려면 이를 이끌어갈 구심점이 필요하단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인식이 확대되면서 국내외에서 임시 정부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생겨나, 연해주의 대한 국민의회,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내의 한성 정부가 세워집니다.
하나의 임시 정부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갈리는데 무장 독립 투쟁 지휘에 유리한 연해주에 임시 정부를 두자는 쪽과 외교 활동에 유리한 상하이에 임시 정부를 두자는 쪽으로 나뉩니다.
결론적으로 외교론에 힘이 실리고 여러 논의를 거쳐 1919년 9월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통합 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수립됩니다.
외교에 밟은 이승만과 무장 투쟁 경험이 많은 이동휘를 지도부로 구성해 외교와 무장 투쟁의 균형을 마춥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였는데 삼권 분립 체제에 바탕을 두고 구성됩니다.
행정기관인 국무원,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사법기관인 법원으로 권력이 분산됩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은 황제의 나라인 대한 제국에서 국민의 나라인 대한민국으로 첫발을 내딛었음을 의미합니다.
헌법 전문에도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독립을 향해 전진을 하지만 1920년대 초 일제의 탄압으로 연통제와 교통국이 와해되면서 심각한 재정난에 부딪힙니다.
그리고 이승만 계열의 외교 독립론, 이동휘 게열의 무장 투쟁론, 안창호의 실력 양성론 등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간의 갈등도 나타납니다.
1919년 2월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위임 통치 청원서를 보내 일본대신 국제 연맹이 우리나라를 맡아서 통치해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있습니다.
이에 신채호, 박용만 등의 무장 투쟁론자들은 화가 나고 이를 문제 삼아 임시 정부의 개편을 주장합니다.
각계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1923년 상하이에 모여 국민대표 회의를 개최하는데 새로운 정부를 세우자는 창조파와 개편, 보완하자는 개조파가 대립하고 성과없이 결렬됩니다.
많은 민족 운동가들이 임시정부에서 이탈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의 자리에서 탄핵하고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과정에서 세력이 크게 약해집니다.
헌법을 고쳐 대통령제를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제로 전환하고 일종의 집단 지도 체제로 임시 정부에 누구나 다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합니다.
임시 정부는 안정을 되찾지만 온전히 회복하지못해 김구는 1931년 한인 애국단을 조직합니다.
아래 영상도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공부하면서 같이 만든 영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30B10_CZP8&t=306s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짜투리시간에 공부하는 한국사] - 38. 청산리대첩 - 봉오동전투 (28) | 2022.09.06 |
---|---|
[짜투리시간에 공부하는 한국사] - 37. 신간회(좌우연합) (22) | 2022.09.06 |
[짜투리시간에 공부하는 한국사] - 35. 국내비밀결사(1910년대) (14) | 2022.09.05 |
[짜투리시간에 공부하는 한국사] - 34. 민족말살통치(1930년대) (12) | 2022.09.05 |
[짜투리시간에 공부하는 한국사] - 33. 3.1운동과 문화통치(1920년대) (18) | 2022.09.04 |
댓글